제대하자마자 근처 가장아파트 신축 공사장으로 막일을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어 입대 전처럼 공사판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공사 거리를 잡지 못해 떠돌았고 내 품삯이 생계의 전부였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어머니는 10년이 넘게 만성 뇌막염을 앓았고 진통제 ‘뇌신’ 없인 하루도 살 수가 없었다. 100원도 안 되는 그 약을 사지 못할 때면 단칸방 구석에서 머리띠를 동여매고 울음 울었다. 내 미래가 침몰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를 두고 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둘째는 서울에서, 막내는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 무렵 나의 유일한 위안은 주인집 손녀 정아였다. 할머니가 키우던 무남독녀 그 아이는 늘 혼자 책을 보며 놀았다. 나를 잘 따랐다. 여섯 살이었지만 명문대 출신인 부모를 닮아선지 영특하고 아이답지 않게 내명內明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아이와 나는 동네를 산책했다. 난 시와 소설, 과학 얘기를 많이 했고 정아는 자기가 읽은 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담긴 아이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나는 겨우 숨통을 틀 수 있었다. 그 여름날 석양의 산책길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그대로다.
유성 상대리에서 다리 공사 목수 일을 잡은 아버지가 이사 가자고 했다. 그 동네 노인 부부가 집이 커서 적적하다고 집세 안 받을 테니 행랑채 두 칸에 들어와 살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점심 먹으러 들어온 나를 기다렸다는 듯 정아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펴보니 내가 좋다는 말이었다. 아이 마음이 고마워 머리를 쓰다듬고 돌려주었다. 그다음 날인가, 안집 현관 앞 둥근 향나무 위에 종잇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그 편지였다. 아차 했다. 내가 편지를 돌려준 게 제 마음을 사소하게 무시한 거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때의 정아 눈망울 닮은 한 아이가 아파트 정자에 들렀다. 시적인 감성이 돋보여 이뻐하는 아이다. 학원가야 한다며, 오늘도 오래있지 못한다며 인사하고 돌아선다. 괜찮아. 할아버진 3초만 너를 봐도 하루종일 기뻐! 말하고, 만들던 나비 공예품을 집어 들었다. 발소리가 없어 돌아보니 기대앉은 기둥 뒤에서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다. 저를 아끼는 내 마음을 느꼈나 싶어 뭉클했다. 아이가 가고, 그 옛날 정아의 찢어버린 편지가 떠올랐다. 정아는 내 답장을 바랐을 것이다. 너를 3초만 봐도 삼촌은 하루종일 기뻐! 이런 답장을.
군대 가기 얼마 전, 옥천의 어느 산길가 둠벙에 비친 저녁별이 기억 속에 빛난다. 험하고 긴 공사판 하루 일을 마치고 숙소로 넘어가는 내 참담한 젊은 날을 고요히 비추어 준 별 하나. 목동자리였나, 서녘 별. 내팽개치고 싶은 내 나날을 고개 너머로 선하게 인도하는 듯했다. 그래, 아이들은 저희들 눈 속으로 오늘의 나를 인도하는 연못 속의 그 저녁별이 아닌가. <내 시는 없다>는 수년간 나와 놀아준, 성찰과 위안을 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갚는 마음으로 썼다. 어쩌면 정아의 찢어버린 편지에 답장을 쓰는 마음으로.
2020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