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폴 비릴리오
두 번째 비평집을 묶는다. ‘무너지는 성, 일어서는 폐허’는 언젠가 비평집을 묶는다면 책의 제목으로 삼으려고 염두에 둔 문장 중 하나다. 좋은 비평의 정신은 누군가 견고히 쌓아 놓은 ‘성’(城)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무너트리고자 하는 ‘폐허’의 정신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믿는다. 또한, 아무것도 구해 낼 수 없는 폐허라 할지라도 그 풍경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낸 비평의 생명력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마음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비평은 늘 까닭 없이 분주하고 홀로 더듬거리며 상대 없이 사랑하고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기도 한다.
고백하자면 내 글쓰기의 내구성은 ‘실패’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사뮈엘 베게트가 전한 위로의 메시지처럼 “시도했고,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에 맞닿는다. 특히 나에게 있어 시인들의 시를 읽고 비평문을 쓰는 일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시인들이 발표한 시를 읽을 때마다 시가 무척 쓰고 싶었고, 그런 마음으로 책상에 앉을 때마다 나는 결국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하고 좌절하는 내 모습만을 확인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했던 것은 시 읽기였다. 그러니까 내 비평의 출처에는 시인들이 애써 허락해 준 일어서는 폐허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2014년부터 시작해 최근 2023년까지 근 10년 동안 문학잡지에 기고했던 결과물이다. 처음부터 글의 체계를 생각하고 쓴 비평문이 아니기에 두서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폐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게 비평의 역할이듯 문학의 의미와 존재 양식에 대해 제 나름의 해명과 문학 주제별 특징을 정리하다 보니, 나름대로 비평집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폴 비릴리오의 전언처럼 이 비평집은 다양한 발명보다는 ‘난파’와 ‘탈선’과 ‘충돌’ 그리고 ‘추락’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쓴 글일지도 모른다. 그 폐허의 감정을 꽤 오랫동안 관찰하고 습득하면서 나는 이내 그것들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부에 실린 글들은 시인들의 개인 시집에 붙인 발문 혹은 해설이다. 첫 독자로서 미적 모험의 임무를 흔쾌히 허락해 준 시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부에 실린 글들은 문학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룬 내용이다. 글을 쓰면서 아름다운 시인들의 삶과 고색창연한 시 창작의 원리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3부에 실린 글들은 시집에 관한 서평의 모음이다. 몇 년 동안 시와 내외하고 있을 때 시와의 끈을 놓치지 않게 도움을 준 고마운 기억들이다. 4부에 실린 글들은 2022년과 2023년 사이 문학잡지에 수록된 시인들의 시를 읽고 쓴 시평들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만의 굳건한 시의 영토를 구축한 작품들이다. 내 파편 같은 글들이 해당 시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언제나 그렇듯 비평문을 쓴다는 것은 내게 젠가 놀이의 하나처럼 여겨지곤 한다. 이 비평집이 젠가 놀이의 몇 번째 조각으로 기억될지는 나도 모른다. 무너지는 성의 마지막 벽돌일지 아니면 일어서는 폐허의 첫 새싹이 될지 사실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시가 머문 자리마다 비록 폐허일지라도, 비평이 끝내 기억해야 하는 지번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 내 곤궁한 글쓰기의 여정에도 그런 사랑의 조각들이 깃들길 바랄 뿐이다.
2023년 겨울
글마음조각가 김정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