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무엇인가 나의 흔적을 남겨놓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40여년 쓴 서체집(書體集) 출간도 그 하나이고, 육필 시집도 거기에 든다. 대선배 권옥연 화백은 내 글씨를 보고 봉두난발체라고 하셨다. 글씨를 못 쓴다는 말보다 봉두난발체라는 말씀을 듣고 기뻤다.
어쩌다 육필로 쓴 시집을 받을 때마다 나도 한 권 남기고 싶었는데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작년에 나는 시선집을 내고 쓰러졌다.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 살아온 종착역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풍경인’은 내 모습이고, ‘초개눌인(草芥訥人)’은 그동안 여기까지 기어온 나의 어눌한 표정에 다름 아니다.
황량했던 세상을 지나오면서 슈만의 오보에와 피아노 2중주 <달밤>을 국자로 떠 마시기도 했고, 다 끝장난 얼룩 같은 사랑을, 그리고 노리끼리한 늙은이를 에워싼 처녀들이 박쥐우산 들고 비 오는 사선 밖으로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서 육필 자작시를 쓰고 있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라고 옛 선인들이 말했다. 육필시는 그러므로 한숨이고 노래이다.
엄광용의 소설을 읽으면서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상상력에 의한 허구인데 전혜린 이후 온몸으로 생을 소진하다가 떠난 한 화가의 열정의 몸부림에 긍정했던 것은 예술가가 남긴 몫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 때문이다. <꿈의 벽 저쪽> 사실의 절반은 10여 년 전 작가가 찾아왔을 때 내가 제공한 손아래 친구 최욱경의 일화였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 장면, 전람회장에서 작가가 만난 죽은 화가의 부활에 나는 소름이 돋았었다.
세상이 살벌해지는 감이 든다. 아름다운 것, 경이에 넘치는 것, 네 살도 내 살도 저며 주던 그런 세상을 살고 싶었다. 춤 보며 여기까지 걸어온 삶인데 후회는 없다. 춤자료관 하나 남기고 가겠다는 꿈도 무산되었다. 그래도 열한 권째 평론집을 내면서 내 주위에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