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진짜 엄마가 되기로 했습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치듯 지나가는 회색의 도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고향을 떠나 먼 타국 땅에 온 지 어언 2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85년 뉴욕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내게는 모노톤의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도시 같았다. 회색빛의 거대한 괴물은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고, 난 항상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만 했다. 뉴욕에서 사는 동안 내게는 사계절이란 게 없었다. 내게 뉴욕은 1년 365일 모두 추운 겨울이었다. 회색의 빌딩들에 둘러싸여 밝고 생생한 녹색 빛으로 뉴욕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던 한여름의 브라이언트 파크도,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한가을 뉴욕의 센트럴 파크도 내게는 그저 아무 색깔 없는 추운 겨울이었다.
나와는 생김새도 전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서툰 영어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몸부림을 쳤었다. 남편은 이 회색의 도시에 나를 홀로 남겨두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났다. 한국으로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도 그럴 용기도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자체가 내게는 내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의 실패를 보며 동정을 할 많은 사람들과 나의 퇴보를 비웃을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과 불쌍한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루하루 하루살이처럼 그럭저럭 살다보면 이런 시궁창 같은 삶속에 자그마한 빛이라도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버텨나갔다. 나의 무너진 모습을 아무도 모르니 그게 더 위로가 되었다. 시계바늘 움직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생존만을 위해 살다보니 어떻게든 버텨졌다. 그러나 그날은 이상하게도 다른 날보다 더 외롭고 괴롭기만 했다. 아이들의 활짝 웃는 모습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의 따뜻한 눈빛이 내 기억을 흔들며 꾹 참아왔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니는 봉제공장이 있는 펜스테이션 역에 도착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내게 슬픔은 사치나 다름이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급하게 닦고 전철에서 내려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카페가 하나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 중 반 정도가 입김을 불어대며 총총걸음으로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 카페에 혼자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슨 이유였는지 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문할 때 말할 영어문장을 곱씹으며 카운터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끝으로 가서 섰다. “캔 아이 게러 컵 오브 커피?... 캔 아이 게러 컵 오브 커피?...”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목에 두른 내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졌다. 난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휙 돌렸다. 선글라스를 낀 어떤 남자가 풀어진 내 목도리를 다시 매주고 있었다. 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미친놈이 어디서 수작을 부려!” 하고 상대를 밀쳐 버렸겠지만 그 말도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조금 있으니 익숙한 향취가 내 몸 전체를 휘감으면서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가는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목도리에 손을 뗀 그 남자는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너무나 그리워했던 그 눈빛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익숙한 그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금산에서 온 수양 씨가 아닌가요?”
나는 너무 놀라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카페를 나와 봉제공장을 향해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카페 앞에 서서 도망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공장 빌딩에 도착하자마자 난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로 뛰어가 찬물을 틀고 연거푸 세수를 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내 피부에 닿으며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걸 느꼈다. 절대 그 사람일 리 없다. 한국도 아니고 낯선 미국에서, 그것도 뉴욕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됐다. 좋은 여자 만나 아이 둘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디서 왔고, 내 이름도 알지 않았는가? 분명 내 귀에 환청이 들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너무 그리운 나머지 내 귀가 장난을 친 게 분명했다.
나는 겨우겨우 어지러운 마음을 차가운 물로 씻어버리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내 자리에 앉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작업대 위에는 옷감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갈 곳이 없어서 노숙자 신세로 밤마다 울면서 길거리를 헤매던 게 얼마 전 일이었다. 덩치 큰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공원 벤치에 누워 두려움에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억지로 잠을 청했던 게 엊그제 일이다. 한국에 계신 불쌍한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해 정신을 차려야만 한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자연스레 내 손은 쌓여 있는 옷감들로 향했다. 난 분명히 이번에도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