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팔년쯤 후,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때 강물은 손도 담글 수 없게 더러워져 있었다. 흰 거품이 끓고 나쁜 냄새가 났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강가에 주저앉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제 저 강은, 내 추억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가. 이 소설은 아ㅏ도 그때의 상실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첫 창작집을 재출간하면서 잠시 뒤돌아보니 삶은 연속되는 시간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단애와 단애 사이를 건너뛰는 일이 아닌가 싶다. 12년 전에 출간된 책이고, 그 안에 수록된 작품은 대체로 이십 대에 씌어진 것들인데 그 격세지감은 아예 단절감과 맞먹는다. 그 시기에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자주 야근도 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휴가나 연휴 등 빈 시간을 만나야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1년에 단편 하나 쓰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늘 이마를 뜨겁게 했던 그 열망이 기억난다.
책을 다시 훑어보니 그 시기의 내 모습이 조금 명료해진다. 그토록 남근선망 상태에 있었구나(세 편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의 화자가 몽땅 남성이다, 그때 나는 아직 여성이 아니었다), 그토록 스테레오 타입으로 세상을 읽었구나(그때는 80년대였고 내 의식도 아직 덜 분화되어 있었다), 그토록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구나(뭘 몰라서 겁이 없었거나 방어 의식 때문에 경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싶다. 그래도 그 모든 못난 내 모습을 돌이켜 안아주는 심정으로 이 책을 다시 낸다.
몇 해 동안 쓴 중.단편집을 모았다. 몹시도 닫힌 마음으로 쓴 것, 조금쯤 숨통이 트인 때에 쓴 것, 모든 걸 다 털어버려 허탈한 마음일 때 쓴 것. 그것들을 한자리에 늘어놓고 보니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고 죽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말하고 침묵하는 것, 그런 때들 사이에는 또 건너뛸 수 없이 깊고 음험한 수렁이 있을 것이다. 그 수렁에 대해서조차, 말할 수 있는 때, 건너뛸 수 있는 때가 따로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대학 친구와 이야기 나누던 중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얘, 난 마흔이 넘어도 마음이 이럴 줄 몰랐어."
나는 친구가 말한 ‘이럴’는 의미를 한순간에 확연히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십대의 미숙과 혼돈을, 삼십대의 현실 적응 노력과 무력감을 서로 지켜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와 같으며, 그 마음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될 수도 있음을 짐작한다.
"얘, 나는 예순이 되어도 마음이 그럴 거라는 사실이 더 그래."
우리는 '이럴'이나 '그럴'에 내포된 의미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공감하는 시선을 나누며 웃었다.
마흔으로 넘어서는 고개에서 그런 '마음' 때문에 외국 여행을 했다. 누구나 하는 여행인데 다소 화제가 된 것은 집을 팔아서 여행한다는 사실 때문인 듯했다. 내가 집을 판 것은 오직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는데 어떤 이들에게 그 일은 삶의 터전을 정리하는 듯 비장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것 역시 서로 다른 '마음'에서 비롯된 해석과 수용의 차이였을 것이다.
애초에 여행기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취재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던 이십대 내내 내 소원은 관찰하거나 기록하지 않고, 활자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상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감을 열고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온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감각과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여행은 바로 그 소원대로 진행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기록하거나 기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쓰게 된 것 역시 '마음' 때문이었다. 마음 속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십대 중반부터 정신분석과 심리학 책을 읽어온 마음, 생의 한 시기에 정신분석을 받았던 마음, 그 뒤 끝에 여행을 떠났던 마음들이 이 책을 계기로 일단락지어진 듯하다.
책을 쓰는 동안 비전문가로서 배타적 전문 영역을 침해하는 듯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전문 분야에 대해 언급할 때는 책의 출전을 밝히고 직접 인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옴표 속에 들어 있지 않더라도 전문 개념들은 <정신분석용어사전>, <융 분석비평사전>, <라캉 정신분석사전> 등 세 권의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서로 잘 소통되지 않고, 각 학문 분야 내에도 여러 학파들이 존재하면서 서로 다른 이론을 주장한다고 알고 있다. 비전문가로서 편리한 점은 그들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음’에 드는 대로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점,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감사드린다.
20대 중반부터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에 대중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개념을 만날 때면 ‘인간의 마음을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설명해 주는 책은 없을까’ 꿈꾸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사람풍경》을 쓰면서 그때 꿈꾸었던 책을 떠올리곤 했다. 여행 이야기를 표면에 배치한 이유도 쉽고 재미있게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나는 밤송이 하나를 받아 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고 있었던 것 같다. 손바닥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 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 쥘 수도 없었다. 겨우겨우 밤송이를 까고 그 안의 것을 꺼내 들었을 때는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산다는 게 밤송이 같을 수가 있는가. 그때는 진갈색으로 빛나는 밤톨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삶이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에 진갈색 껍질을 벗겨 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는 연갈색 융단 같은 보늬가 있었고 그때는 또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밤알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만큼 살면서 내가 터득한 게 하나 있다면 어떤 실수든 어떤 시행착오든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게 낫다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삶은 반복되는 실수와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야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설과 내가 서로에게 의미 있고, 소설쓰기와 내가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것은 깊고 충만했다. 2001년 10월.
처음에 나는 밤송이 하나를 받아 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고 있었던 것 같다. 손바닥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 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 쥘 수도 없었다. 겨우겨우 밤송이를 까고 그 안의 것을 꺼내 들었을 때는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산다는 게 밤송이 같을 수가 있는가. 그때는 진갈색으로 빛나는 밤톨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삶이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에 진갈색 껍질을 벗겨 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는 연갈색 융단 같은 보늬가 있었고 그때는 또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밤알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만큼 살면서 내가 터득한 게 하나 있다면 어떤 실수든 어떤 시행착오든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게 낫다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삶은 반복되는 실수와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야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설과 내가 서로에게 의미 있고, 소설쓰기와 내가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것은 깊고 충만했다. 2001년 10월.
이 소설에 완전히 집중해 있던 지난 이 년 동안 거의 매일 산에 올랐습니다. 조그마한 동네 뒷산이지만, 문학적 과장을 조금 섞는다면, 그 산도 우주를 품고 있었습니다. 산은 생명체가 생장하고 열매 맺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우주적인 비의를 보여주었고, 저는 자주 걸음을 멈춘 채 오감을 열고 산의 마음을 느껴보려 애썼습니다. 이번 소설은 아무래도 그 산의 창조성을 조금 빌려온 것도 같습니다.
'마흔 살이 넘기 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말이 이마에 박혀 있었다고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소설을 썼을 것 같다. 그것이 내게는 삶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 지점을 넘어서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아무 저항감이나 저어함 없이,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소설을 쓰리라 꿈꾸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그 작업의 첫 발자국이 되어 주었다는 점에서 내게 소중하다. 소설에 묻어 있는 그 시기다운 미숙함까지.
'마흔 살이 넘기 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말이 이마에 박혀 있었다고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소설을 썼을 것 같다. 그것이 내게는 삶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 지점을 넘어서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아무 저항감이나 저어함 없이,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소설을 쓰리라 꿈꾸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그 작업의 첫 발자국이 되어 주었다는 점에서 내게 소중하다. 소설에 묻어 있는 그 시기다운 미숙함까지.
'마흔 살이 넘기 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말이 이마에 박혀 있었다고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소설을 썼을 것 같다. 그것이 내게는 삶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 지점을 넘어서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아무 저항감이나 저어함 없이,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소설을 쓰리라 꿈꾸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그 작업의 첫 발자국이 되어 주었다는 점에서 내게 소중하다. 소설에 묻어 있는 그 시기다운 미숙함까지.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은 10년 독서 모임 경험의 결과물이다. 독서 모임에서 구성원들과 나눈 이야기이며,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이며, 그들로부터 촉발된 영감과 통찰 모음이다. 그들과 나눈 상호 작용이 없었다면 이러한 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서 모임에서 내 역할은 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내면을 비춰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소개하고, 모임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당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더 깊은 마음을 읽어주었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방향을 안내하고,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을 때 희망의 당근을 내밀었다.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그러한 경험들의 적은 부분이다.”
시나리오를 검토했을 때는 조금 더 호감이 생겼다. 그 내러티브에는 사랑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환유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묻어났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내면에서 끝난 사랑과 시작되는 사랑, 분노에 찬 사랑과 연민에 젖은 사랑, 절망인 사랑과 희망인 사랑이 동시에 교차하면서 소용돌이치는 그 상황들이 나로 하여금 소설로도 표현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상실과 애도를 책을 주제로 잡은 것은 그것이 정신분석적 심리 치료의 핵심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사회적 병리의 모든 원인은 사랑을 잃거나 소중한 대상을 상실한 후 그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별할 때 취할 만한 방법들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 통용되는 몇 가지 지침들은 오히려 마음을 더 병들게 할 뿐이다. 이즈음 정신분석과 심리학은 공히 애도를 마음치료의 핵심 개념으로 제안한다. 오래된 상실에서 비롯된 마음의 문제는 뒤늦게 애도 작업을 잘 진행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 잃은 대상을 뒤늦게라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일은 또한 개인적으로 변화, 성장하는 소중한 방법이기도 하다.
상실과 애도를 책의 주제로 잡은 것은 그것이 정신분석적 심리 치료의 핵심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사회적 병리의 모든 원인은 사랑을 잃거나 소중한 대상을 상실한 후 그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별할 때 취할 만한 방법들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 통용되는 몇 가지 지침들은 오히려 마음을 더 병들게 할 뿐이다. 요즈음 정신분석과 심리학은 공히 애도를 마음 치료의 핵심 개념으로 제안한다. 오래된 상실에서 비롯된 마음의 문제는 뒤늦게 애도 작업을 잘 진행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 잃은 대상을 뒤늦게라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일은 또한 개인적으로 변화, 성장하는 소중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여러분들의 낮은 목소리와 생에 대한 사랑이 모아져 윤곽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끊임없이 들려오던 상담 메일과, 질문에 공감하여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이들, 질문에서 가지를 치고 자라는 또 다른 질문들을 보면서 저의 마음속에서도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은 서로서로 공감하는 수천 개의 마음과, 그 마음에 공감하는 저의 마음이 만나 술처럼 빚어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