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조각보의 조각천처럼, 사진과 함께 이어 붙여진 볼드윈의 말과 글을 따라가면서 탄탄한 서사에 풍부한 은유와 상징을 느끼다 보면 장르를 정의할 수 없는 문학 작품을 읽은 느낌이 든다. 작가란 무엇인지, 작가와 화자의 관계는 무엇인지 예술 작품의 형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돕는 매력적인 텍스트다.
알고 보면,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364일!
앤드류 리즐리의 왬! 회고록을 우리말로 출간하자는 출판사 대표의 말에 역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아니, 당연히 우리가 번역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앤드류가 왬!의 팬은 대부분 “미성년자 소녀팬들”이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우리야말로 어려운 록 음악에 심취한 언니오빠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왬!을 좋아했던 소녀팬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세계적으로 천 만장이 팔렸다는 <메이크 잇 빅> 앨범의 판매기록에 적어도 3장 이상은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경기도 양주 군부대 근처의 작은 레코드점에서 팔렸던 앨범도 공식 집계에 넣어줬다면 말이다.
왬!의 팬으로서
<웨이크 미 업 비포 유 고고(Wake Me Up Before You Go Go>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생하다. 1985년쯤이었을 게다. 김광한 아저씨가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외국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던 코너가 있었다. 하얀 바탕 화면에 흰 티셔츠를 입은 앤드류와 조지가 춤을 추며 등장하던 그 노래는 그때까지 내가 어디서도 보거나 들어본 적 없는 소리와 이미지였다. 이후, 교실에서는 팝을 좋아하지 않던 친구들도 왬!의 화보는 한두 장씩 챙길 만큼 조지와 앤드류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밴드 해산 소식이 들렸다. <여학생>을 비롯한 소녀 잡지에서 왬!의 일본 공연과 중국 공연 사진들을 오려 모으며 부러워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오지도 못하고 해산해버리다니! 아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번쯤은 다시 재결합 공연을 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다가 그마저도 잊고, 아니 10대 시절의 일은 왬!만이 아니라 담임선생님이나 짝꿍들 이름도 다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 조지 마이클의 갑작스런 부고를 듣고 놀랐던 팬이 우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아직 듣고 싶은 노래가 더 많았던 왬!의 팬들에게 그 시절을 돌려주는 책이다. 소문으로만 짐작했던 이야기들을 앤드류를 통해 찬찬히 들어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앤드류가 개인 소장한 왬!의 사진들을 살펴볼 수 있다.
책의 1부에서 어린 시절 두 사람이 어떤 친구사이였는지, 가족과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왬!을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했는지, 우리가 미처 궁금해할 틈도 없었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면, 2부는 왬!의 본격적인 활동 이후, 궁금했지만 더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자세히 나온다. 조지 마이클은 언제 ‘게이’라는 성정체성을 알게 되었는지, 앤드류와 친구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조지가 뮤지션으로 두각을 보이는 동안 앤드류는 어떤 마음으로 왬!을 함께 했는지, 왬!의 해체를 합의하고 헤어질 때의 과정은 어떠했는지, 중국투어와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어떠했는지, 무엇보다 조지 마이클이 세상을 떠난 후 앤드류와 셜리, 펩시는 어떤 마음인지.
이 책의 독자로서
조지와 앤드류는 영국을 대표하는 청춘스타였지만, 조지의 부모님은 그리스 내전 이후 영국으로 이민 온 그리스계였고 앤드류의 아버지는 2차 대전 이후 이집트가 민족주의로 혼란할 때 이민 온 이집트계로 이민 1.5세, 혹은 이민 2세였다. 교외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을 읽다보면 가족과 이웃, 친지들의 활기차고 따뜻한 마을공동체가 느껴지는데, 어쩌면 외국계라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오히려 그 시절 영국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을 더 잘 대변해주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앤드류의 어린 시절은 1960-70년대 영국의 사회복지제도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10대 시절 앤드류를 갖고 학업을 중단했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낳고 교원컬리지를 다니는데, 어머니가 공부하는 동안 동생과 무료로 컬리지 수영장에서 놀며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왬!이 활동하는 1980년대에 이르면 치솟는 실업률, 가두시위, 탄광노조를 지원하는 기금 마련 자선공연 등 대처(Margaret Thatcher) 시대를 짐작케 하는 여러 사건들이 배경으로 나온다. 사회에 무심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음악이 사회적 구호로 받아들여지는 게 한 편으로는 부담스러웠던 앤드류의 마음이 차분하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화려하고 과장되고 극단적인 여러 시도가 공존했던 1980년대 팝계에서 대중이 왬!을 소비하는 욕구와 이미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반추하며 돌아보는 앤드류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두 사람이 살아온 영국사회와 대중음악의 역사가 영화의 OST처럼 회고록 전반에 깔려있는 느낌이랄까.
10대 시절이 오래 전에 지나간 사람으로서
음악을 좋아하는 지금의 10대들이 앤드류의 이야기를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크다. 가수가 되고 싶거나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싶은 친구들에게는 팝이 처음으로 뮤직비디오와 함께 산업으로 작동하던 1980년대의 대중음악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평범한 교외도시의 두 청년이 팝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유행하는 여러 음악을 들으면서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가족과 마을, 학교에서 모든 이들의 화젯거리가 되는 사회분위기는 지금 우리와 비추어보아도 충분히 흥미롭다. 왬!만이 아니라 엘튼 존, 레드 제플린, 퀸, 프린스, 데이비드 보위, 제네시스 등 왬!이 좋아했던 뮤지션들에 대한 추억도 커다란 읽을거리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진심으로 읽어줬으면 하는 대목은 ‘앤드류가 어떻게 2인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가’이다. 왬!이 성공하려면 친구인 조지가 음악을 주도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합의한 이후(스스로 작곡에서 아예 손을 뗀 것을 후회하는 대목에서는 조지보다 앤드류의 소녀팬이었던 나로서는 많이 아쉬웠다),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끝까지 조지의 좋은 친구로 왬!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왬!의 해산 이후에는 뮤지션이나 스타가 아닌 개인의 삶을 의연하게 살았다. 앤드류는 영국의 3대 보컬로 엘튼 존과 프레디 머큐리, 조지 마이클을 꼽았다. 그리고 그런 조지가 친구였고, 그가 스타가 되는 과정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말한다. 왬!으로 충분히 이루었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앤드류의 태도야말로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 아닐까. 모두가 조지 마이클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으니까.
엉뚱한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기획사 소속으로 혹은 기획사 바깥에서 스타가 되고 싶어 열정을 불태우는 친구들이 앤드류의 이야기를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앤드류는 “너무 어릴 때 스타가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언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아쉬워했던 이야기를 지금 본인이 직접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을 10대들에게.
끝으로, 번역자로서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Last’(라스트)를 치면 자동으로 ‘Christmas’(크리스마스)가 붙어서 검색된다는 말을 페이스북 댓글에서 읽고 따라해 보았다. 정말 그러했다.
지금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조카들은 왬!이 누구인지, 조지 마이클이나 앤드류 리즐리가 어떤 가수였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께 배워서 곧잘 따라 불렀다. 이렇게 또 한 세대가 지나면 사람들은 왬!이 누구였는지 까마득히 잊겠지. 조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남아있는 앤드류가 무엇을 회고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 그러나 ‘라스트 크리스마스’만큼은 루돌프 사슴코보다 더 많이 부르는 캐럴로 남지 않을까. 그 먼 훗날, 35년 전의 나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어느 10대가 이 노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궁금해 하면서 어느 도서관 검색창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좋은 책을 추천해준 마르코폴로의 김효진 대표와 역자들이 번역하는 동안 도와준 가족에게 감사를 전한다. 1부는 김희숙이, 2부는 윤승희가 번역했다. 어느 쪽이 조지고 어느 쪽이 앤드류였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며, 모쪼록 번역하는 동안 우리가 느꼈던 더없이 행복하고 아련했던 마음이 독자들에게 조금은 전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