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밤마다 생을 벗어 옷장에 걸어 두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십여 년 전에 벗어 놓은 생 꺼내 입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다가,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설움 한 채 토해 내다가, 그 집에 들어 풀피리처럼 울다가, 다 해지고 헐거워진 생 무슨 미련을 두나 생각하다가, 네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 때문에 석회질에 뻑뻑해진 발목 끌며 날마다 산에 오른다.
너는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애써 웃으며 말했지. “빨리 나아서 친구들보다 더 먼저 대학에 갈 거야.
그러니까 엄마, 울지 마!”
매 순간 돌아봄과 넘어짐의 연속이었다.
너 없는 세상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일은 용광로에 던져지는 형벌과도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사그라지지 않는 숨 때문에 천년의 잠을 청하며 잠들곤 했었다.
그래, 이제 울지 않을게.
2010년 3월. 열여섯 번째 봄을 뒤로하고 와병 백일 만에 생을 벗어 놓은 채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나의 큰 달 수야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파이를 구울 때마다
노을 진 강변을 걸을 때마다
애월 바다를 떠올릴 때마다
이루마를 들을 때마다
윤동주를 읽을 때마다
고관절 부러진 뼈처럼
가슴속 대못 하나
더 깊숙이 파고든다
유난히 국화 향을 좋아했던 너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잇몸이 밉다며 입을 가리고 웃던 너
잘잘못을 떠나 모두 내 탓이라며 일기장 가득 반성문을 써 놓았던 너
내게 있어 생이란
무애하는 일
오랜 미래에서 만난 너를
내 안에 심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