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히 김지회의 사진을 보게 됐다. 여수 봉기를 일으켰던 그해, 1948년에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제일 앞줄 가운데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는 판이하였다. 뜯어보면 볼수록 얌전하고, 착하고, 정 많고, 의롭고, 부끄럼 잘 탈 것 같고, 그리고 왠지 외로워 보이는 아주 젊은 청년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봐도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부에 맞서 군란을 주도할 야심가의 인상은 아니었다. 차라리 시인이나 교사, 혹은 신학도라고 한다면 바로 수긍할 만한 인상이었다. 궁금해졌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일을 벌였을까?
- 중략 -
첫 번째 의문을 풀어가면서 김지회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열혈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이야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 권력 따위에는 별 관심 없이, 가난하고 연약한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지키는 참 군인으로 살고 싶어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주변엔 그와 비슷한 성정 혹은 성향을 가진 동료들이 제법 있었다. 여수 14연대의 봉기는 23세의 국군 중위 김지회와 그 또래의 젊은 동지들이 ‘인민의 군인인 우리가 어떻게 제주 인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느냐’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저 그 순결한 마음 하나로 이승만 정부에 항거하겠다는 뜻을 만천하에 밝힌 사건이었다.
- 중략 -
압권은 역시 조경진과의 사랑 이야기였다. 조경진은 김지회에 대하여 많은 걸 설명해 주었다. 특히 김지회의 마음과 영혼이 그의 죽음과 동시에 증발해버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던 건 거의 온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목사의 딸인 조경진은 자기 남자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뚝심과 사랑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의 그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김지회의 인생에 하나님의 기운이 조금씩이나마 서서히 스며들었고, 김지회가 그의 마지막 시간에 받은 구원은 그 최종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