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고옥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을 맞고 주춧돌이 오목하게 패인 걸 기이하게 여기곤 했다. 낙숫물이 따라락 타닥 따오록 주춧돌과 입맞춤 할 때, 고옥 뒤의 예배당에서 들려오던 풍금 소리랑 화음을 이루던 게 마냥 좋아 가만히 귀 기울였다. 가끔 빗줄기를 타고 내려온 미꾸라지의 초청을 받고 남새밭 풀숲에서 뛰어온 청개구리가 오목어항에서 어우러져 헤엄치는 걸 지켜보노라면, 고옥 버팀목의 나이테가 생생히 살아 움직이던 환각에 젖곤 했다.
나의 글쓰기도 끈질기게 길쌈 삼는다면, 어느 날엔 기필코 낙숫물이 주춧돌을 돌확으로 바꾸듯 하리란 믿음을 지녔기에, 고된 행진을 계속하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일곱 중단편집을 선보인다. 6년 만이다.
그 기간을 날수로 따진다면 얼마나 기나긴 초조함의 연속이었을까. 날마다 손가락을 꼽으며 작품집을 꾸미기 위해 애달아했지만, 해마다 공백으로 끝나곤 했다. 열악한 출판 풍토와 재정의 궁핍함이 아우러진 거라 할지. 아니면 쉬이 결정 못 내린 나의 유약한 성품 탓일 게다.
이제껏 쓴 원고들을 불살라 버리고픈 충동으로 어찔어찔한 순간, 어떤 깨달음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무조건 부딪혀 봐야 한다는 각오였다. 그리하여 탄생된 게 이번 작품집이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발자취를 더듬는 작업이며 희망을 향해 전진하는 인고의 행진이 아닐는지. 더불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불변의 문장을 위해 쉼 없이 갈음하는 게 작가의 탐구 정신일 것이다.
글쓰기는 항시 나를 옥죄면서도 자유롭게 한다. 옥죄는 건 갈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일 테고, 자유로움은 불변의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참 명함을 지니는 것이다.
언제쯤일까. 나의 진짜배기 명함을 지닌 날은.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성경의 아가서 4장 10절의 그 기록이 마냥 좋아 겁 없이 시작한 게 이 글을 쓸 동안 내내 올무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용사들과 그에 따른 여인들을 다루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맥을 꿰어야만 가능하다던 게 갈수록 옥죄어 왔습니다.
저의 작품 속에 등장한 수많은 용사들과 그에 영향을 끼친 여인들과의 동행은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올무를 뛰어넘어 이만큼이라도 기록한 게 아닌지 헤아려 봅니다.
아버님의 내력을 쓰고 보니, 이제야 한이 조금 풀린 듯하다. 어떻게 아버님이 진주 대곡중학교 전신인 대곡고등공민학교 설립자란 내력이 대곡중학교 연혁에서 소멸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긴 해도 대곡중학교를 발전시킨 존함에는 들어 있어, 내가 소제 선생 내력을 밝힌 책자를 꾸미는데 보탬 되었다. 처음 아버님이 대곡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사용한 임시 교사가 대곡면 봉평 바남투에 속한 봉평 동소였다. 그곳은 나의 증조부님이 봉평 동민들의 회의 장소 겸 서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아래 대곡초등학교 교사 부지도 성일주 조부 소유인 걸 조부께서 희사해 일제 당국자들이 지어 명문 초등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불어 소제 선생이 설립한 대곡고등공민학교 교사 부지의 덕더리 동산과 그 아래 논도 당신 소유였다.
까마귀가 궁궐마당을 점령해 소란을 피워 임금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는 말을 듣고는 흥분제를 섞은 수수 찰밥을 몇 수레 분을 지어 보내 궁궐마당에 풀도록 해서 까마귀들이 궁궐마당에서 죽지 않고 물고 멀리 날아가 죽도록 했다. 감탄한 선조가 그 지혜로운 부인의 아들이자 임진왜란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구한 신하 서성을 불러서 사돈을 맺자고 했다. 이경의 외아들 약봉 서성이 달성서문의 거목으로 그 가계가 조선 후기에 가장 과거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모자의 공덕과 지혜가 함께 이룩한 것이다. 이경이 한성으로 이주할 당시는 16세기 초였는데 데리고 있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한양으로 데리고 간 노비들도 노비 문서를 없애고 임금을 받는 하인으로 고용했다. 당시에는 남성도 하기 힘든 통 큰 선구적인 인도주의의 실천이었다. 조선 시대의 세분 현모는 신사임당, 장씨부인, 정경부인 장님 고성이씨였다. 앞의 두 분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경부인 장님 고성이씨는 덜 알려져 그분의 행적을 형상화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이 당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했던 서해 선생이 23세에 요절해 대구서씨 가문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장님 고성이씨 부인의 끈질긴 노력과 헌신으로 외아들 약봉 서성 선생이 6도 관찰사와 형조, 병조, 호조, 공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으며, 손주 서경우가 우의정에 올라, 그분이 정경부인으로 추존 되었습니다. 그분은 노비를 해방시킨 선구자입니다. 안동 소호헌에서 청주로, 다시 장정의 길에 올라 한성에 당도해 중씨 댁에서 살며, 새집을 지어 이사한, 맹모삼천을 실천한 현모였습니다. 장애인들과 이웃에게 베풂을 실천한 자선가이며, 고난을 승리로 이끈 개척자입니다. 아들과 손주들을 참 인재로 키운 교육자이며, 앞날을 꿴 의인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