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엄마 마중>과 2005년 <나이팅게일>로 어린이책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김동성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동성 선생님은 미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벤 샨(Ben Shahn, 1898~1969)처럼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문제의식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현실참여적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합니다.
무엇보다 일러스트는 오직 그림 하나로 승부하는 작업이고, 텍스트를 가지고 다양하게 작가 나름의 해석을 넣음으로써 회화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독창성"과 상업미술에서의 "소통성" 두 가지를 같이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어서 자연스레 이 길로 들어섰다고 하시네요. 선생님이 디자인하신 레종 담배의 고양이 그림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 알라딘 편집팀 어린이담당 류화선)
아이들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는 그림
알라딘 : 그림책뿐 아니라 다양한 일러스트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요, 어린이라는 한정된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은 다른 작업에 비해 제약이 많지 않은지요.
김동성 : 제약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제약이 많다기 보다는 성인물에 비해서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에 비해 이해의 반경이 좁고, 직관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니까요. 여과없이 본다고 할까요. 아이들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림책의 텍스트 선정에서부터 자신이 자신있게 표현할 수 있고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글을 선택합니다. 일차적으로 일러스트 작가가 글에 대해 감동받지 못하면 독자의 상상력을 능가하는 수준의 비주얼을 뽑아내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린이가 보는 책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면 않된다거나 저것은 저렇게 그려야 한다는 식의 원칙은 성립될 수가 없고, 또 그러한 이유로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리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할 때 텍스트에서 말하는 것들을 설명적이거나 반복적 이미지로 보여주기 보다는 은유적으로 해석해서 텍스트에서 말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이끌어 내려고 합니다.
알라딘 : 제가 생각할 때, <엄마 마중>이 그런 은유적인 느낌이 강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김동성 : <엄마 마중>은 무척 단순한 텍스트이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심의 애틋한 모습을 보여주는 글일 수도 있고, 에피소드적인 일상의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고, 이태준이 살았던 시대의 우울함을 표현한 글일 수도 있습니다. 다중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텍스트이지요. 저는 아기의 현실과 상상을 그린 두 가지 그림을 병치하면서 그런 텍스트의 다양한 느낌을 살려내고자 했습니다.
알라딘 : <엄마 마중>의 경우, 많은 독자들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기와 엄마가 만나는 장면을 찾지 못해서 슬픈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엄마와 아이가 만나는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생각이 드네요. 아이와 엄마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 현실일 수도 있고, 현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김동성 : '엄마 마중'을 처음 접했을 땐 일면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 막막한 느낌이었습니다.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고 상황에 대한 묘사만 극단적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어 행간의 의미를 꼼꼼히 느끼기 전에는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놓칠 수도 있거든요. 콘티를 짤 때는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자는 생각에서 판타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심하게는 전차는 '이웃의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등장인물도 인간이 아닌 동물로 하면 어떨까 하는 비약적인 생각도 했었죠. (웃음)
완성된 그림책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분위기가 나긴 하지만, 사실 고증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그림책이 정보성이 강한 다큐멘타리였으면 응당 철저한 고증과 역사성을 담아야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그림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감성적인 판타지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위기의 연출을 위해 전차의 운행 방향이나 구성에 있어서도 그림책의 흐름을 위해 실제와 다른 모습으로 편의적으로 처리했어요. 그래야만 화면 오른쪽에 아기가 있어야 왼쪽에서 오는 전차의 이미지(엄마, 즉 바라고자 하는 긍정을 상징)에 대한 기다림이 더 간절하게 표현되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시대성이나 역사성이 아니라 엄마의 부재에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어린 아기의 심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 지점을 향해 적절한 장면연출을 구상해서 그 느낌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독자들이 <엄마 마중>을 판타지로 생각해 줬으면 합니다. (웃음)
엄마에 대한 그리움, 저는 그런 느낌을 <엄마 마중>에 담고 싶었습니다. 작위적이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아기가 엄마를 기다리면서 느끼는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도 느끼게 하고 싶었지요. 아기를 두드러지게 슬픈 표정으로 그리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엄마 마중> 속의 아기는 상상 속의 아기의 모습
알라딘 : 독자분들이 <엄마 마중>에 등장하는 아기가 참 사랑스럽다고 하시던데요. 혹시 자녀분을 모델로 하셨나요? 다른 그림책 작가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하시기도 하던데요.
김동성 : 그건 아닙니다. <엄마 마중>의 아기는 제 상상 속에서 만든 아기의 모습입니다. 저는 그림책을 작업하면서 순수하게 그림책 독자의 입장에 있는 아내의 의견을 참고하는 편이에요. 채색이나, 시점,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칭찬은 많이 받아보지 못했어요. (웃음) 제 그림책을 보면서, 이건 이래서 부족하고, 저건 저래서 부족하고 그런 소릴 많이 하지요. 그런 아내가 <나이팅게일>에서는 문양이나 장식묘사에 씨름하는 저를 보고 애 많이 쓴다고 오랜만에 칭찬을 하기도 했습니다.
알라딘 : <엄마 마중>과 <나이팅게일>도 무척 느낌이 다른 그림책이었지요. <엄마 마중>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여운이 많이 남는 그림책이었다면 <나이팅게일>은 화려한 볼거리가 많은 그림책이었지요. <나이팅게일>은 어떻게 작업을 하시게 되셨나요?
김동성 :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은 원고를 의뢰 받아 처음 읽어 볼 때 읽자마자 바로 한 눈에 매료된 글입니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바로 머리속으로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정말 그렇게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어요. 주제나 소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꺼리'가 많고 다양해서 일러스트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은 멋진 작품이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 : <나이팅게일>을 그리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신 점이 있으신가요?
김동성 : 기존에 발표된 <나이팅게일> 그림책들이 서양 작가에 의한 철저히 서양적 시각으로 본 동양의 이야기라면, 저는 원문의 분위기에 맞는 동양적인 '나이팅게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무엇이 동양적인 것이냐"라는 질문에는 사실 명쾌하게 대답하긴 힘들지만요. 인간 중심인 서양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서양화와는 달리 동양화는 자연주의 사상에 입각한 회화입니다. 인물이 중심에 있고 자연은 단순히 배경에 머무는 서양화에 비해 동양화의 산수화에서는 자연 그 자체가 주제가 되고 인물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조그맣게 묘사되는 것처럼요. 여기 <나이팅게일>에서도 볼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예찬, 절대군주제에서의 권위주의나 인공에 대한 허무와 모순 등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잘 어울리는 소재인데 그런 부분을 저는 이 작업에서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궁과 내부는 그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최대한 높여 그려내고자 했고 자연이 묘사된 컷은 수평 구조의 푸근하고 뭉근한 분위기를, 궁성에서의 모습은 병렬적이고 기하학적인 구성을 해서 지극히 인공적인 분위기를 보여 줄려고 했습니다. 복식이나 궁성 내부에 대해서도 고증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시대의 것을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특정한 시대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고증보다는 작품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비주얼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알라딘 : 완성본 원고가 나온 후에도 계속 수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을 손질하셨나요?
김동성 : 신하들이 인조새를 백성들에게 구경시키는 장면 이외에는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장면마다 어색한 부분을 손봐서 완성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텍스트도 약간 수정되었습니다. 안데르센의 원문을 그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 예를 들면 황금 슬리퍼를 목에 걸어주는 장면이나, 배를 때리는 부분이 수정되었습니다.
알라딘 : 기존에 출간된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 그림책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서구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선생님의 <나이팅게일>은 동양적인 아취가 묻어나는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팅게일>은 안데르센의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막연한 중국의 모습을 동양의 시각에서 새롭게 환기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김동성 : <나이팅게일>은 크게 두 개의 대립적인 것이 상징된 텍스트입니다. 화려함과 소박함, 거대함과 왜소함, 근엄함과 익살스러움, 자연물과 인공물 이런 식으로 대립적인 것이 함께 등장하지요. <나이팅게일>에서는 자연물을 제외한 부분-특히 황제를 포함한 인간 군상의 모습-은 모두 비판적으로 그리고자 했습니다.
황제는 처음에는 거대하게 그려지지요. 그는 권력과 부에 둘러싸여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나이팅게일을 통해 자연인으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지요. 페이지를 넘길수록 황제는 점점 작아져 이야기 끝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슷한 크기가 됩니다. 황제를 둘러싼 신하들은 모두 권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해바라기 형'이거나 강자에 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고, 나머지 인간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로 표현했습니다.
알라딘 : 저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익살스럽게 느껴지던데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의 모습은 상당히 시니컬해 보입니다. <나이팅게일>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죽음과 대면하는 황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압도적인 공포가 느껴지는 무서운 그림이었습니다.
김동성 : 그 장면은 <나이팅게일>의 전체 그림 중에서 이질적인 분위기의 컷이었습니다. 사실 그 뒷 장면-나이팅게일이 황제와 화해를 하는 장면-을 좀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황제가 권좌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악과 피해를 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과정에서 황제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직면하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지요. 이렇게 황제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되면서 나이팅게일과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새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 숲속의 현자의 모습입니다.
알라딘 : 예전에 영문판으로 출간된 옛이야기그림책을 제외하고 현재 2편의 그림책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으셨는데요. 작년에 <엄마 마중>으로 백상출판문화상도 수상하셨지요. 아직 많은 작품을 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앞으로 어떤 작품을 낼지, 어떤 작가로 대중들과 만나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김동성 : 아직은 그림책 작가로 제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고, 사실 앞으로 무엇을 그려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엄마 마중>과 <나이팅게일>은 좋은 글을 제 때에 운좋게 만나 작업을 한 경우고, 엄격히 말해 제가 기획하거나 발굴한 텍스트는 아니거든요. 잘 그린 그림보다는 좋은 그림을 위해 계속 공부를 해야겠고 언젠가 몸과 마음이 어느정도 만들어졌다 생각이 들면 글 그림을 같이 아우르는 그림책 작업을 내 놓을 생각입니다.
잘 그리는 것이 좋은 그림은 아니다
알라딘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그림책은 그럼 어떤 것인가요?
김동성 : 특별히 딱 꼬집어서 예를 들긴 뭐하지만 몰리 뱅이나 안나 클라라 티돌름의 작품들에서 그런 생각이 특히 강하게 듭니다. 잘 그리는 작가들은 참 많지요. 하지만 잘 그린 그림이 곧 좋은 그림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나 찰스 키핑, 앤서니 브라운, 존 버닝햄 등은 물론 뛰어난 테크니션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휠씬 뛰어넘어 이른바 '좋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작가들이고 자기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그것을 구현할 테크닉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작가들입니다. 작가로서의 역량은 폭이 넓어야 생깁니다. 폭이 엄청나게 넓어야 깊게 팔 수도 있거든요. 좁고 얕으면 결국에는 표현이 안 되어요.
테크닉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불편없이 보여 줄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좋은 그림책을 그리는데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필요하지만, 테크닉만으로는 감동을 만들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좋은 예입니다. 단지 기술적으로 잘 그린 그림은 가벼운 즐거움을 주지만 가슴 속 깊은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제 지향점도 막연하지만 역시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개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요. 저는 아직 그 지점에 이르기에는 가야 할 길이 멀고 해야 할 준비도 많은 작가이고 현재 그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향해 나름대로 열심히 찾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가 예로 들어준 안나 클라라 티돌름의 두드려보아요 등 보아요 시리즈를 아이들이 특히 세네살 아이들이 늘 읽어달라고 했던 경혐이 있던 터라 잘 그리는 그림보다는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에 더욱 공감했습니다. 김동성 님의 삼촌과 자전거여행, 들꽃아이, 나이팅게일 등 소장하고 싶은 그림책을 그리는 작가님, 좋은 그림 고맙고 눈이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