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하일을 떠올릴 때면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함께 연상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해 대낮에 아테네 시장에서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디오게네스와 박미하일은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 것일까?
그의 소설에서는 ‘노란색’을 맞닥뜨릴 때가 많다. 『사과가 있는 풍경』이 그랬고, 『해바라기』도 그랬다. 단어로서의 ‘노란색’이 아니라, 그가 활자로 표현하고 있는 장면에서, 주인공의 담백한 대사의 행간에서 ‘노란색’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풍족한 생활이라는 것과는 늘 거리가 멀다. 사람을 쉽게 믿고, 쉽게 의지하고, 쉽게 감동하고, 그래서인지 또 쉽게 상처받는다. 때로는 어이없을 만큼 자존심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바보처럼…….’ 하다가 어느 순간 그 주인공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인상 한번 쓰지 않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주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앞에서 지금까지 그 주인공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판단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누구에게든 진심으로 대한다. 가게 마네킹을 실수로 부러뜨렸을 때 드미트리는 자신의 사진기를 담보로 변상을 약속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볼 일 없는 낡은 사진기에 불과하겠지만 그에게는 생명만큼 중요했던 사진기이기에 독자는 그의 진심을 가늠할 수 있다. 거리 떠돌이에게도 그의 진심은 여전하다. 떠돌이나 부랑자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에게 갖게 되는 선입견 따위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그 누구든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그냥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의 대사에서는 어김없이 ‘노란색’이 반짝인다. 억울한 상황에서조차 주인공의 대사에서 상대에게 주먹이라도 날릴 듯한 분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화내고, 자신의 방식대로 불의를 경멸한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그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자신이 하는 일이다. 그에게 ‘일’은 그냥 단순한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쳐 하는 영혼과도 같은 작업이다. 먹고살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른 노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지켜내야 할 때 비로소 그의 자존감이 발동한다. 거의 무일푼인 드미트리가 사진 한 장으로 거액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버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자존감이리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시오’라고 말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작가는 물질과 권력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듯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는 다시금 아무 일 없다는 듯 묵묵히 자기 일만 한다.
드미트리처럼, 그리고 이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