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걸맞지 않게 자유냐 민주냐, 보수냐 진보냐, 우파냐 좌파냐가 요즈음 문제다. 이것은 무슨 거창한 이념에서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온 환경에 적응된 생리현상이다.
여기 우리의 주인공 신미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거창한 이념에 의해서 남과 북을 헤매던 사람들이 아니다. 여기엔 남녀 간의 사랑도 있고 우정도 있고 부모자식 간의 피와 애정도 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진리일 뿐 ‘삶’에는 추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존재하고 버티고 살아 있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살아야 사랑도 할 수 있고 사회 기여도 할 수 있고 애국도 할 수 있고 정치도 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킬 수도 있고 그럼으로써 국가를 빛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 신미자와 이들 모두를 끔찍이 사랑한다. 이승만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도 그래서 사랑하고 존경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이들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전두환 대통령까지 이들의 삶과 정치철학의 DNA가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야생초 같은 생명력 때문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강한 자인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6?25는 확실히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운명의 역사가 되었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이 지울 수 없는 폐허와 절망의 6?25에서 대한민국 나라를 세우고 88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육지에는 자동차가 범람하고, 바다에는 우리 조선이 5대양6대주를 누비고 다니고, 하늘에는 우리 태극마크의 보잉747 제트항공기가 세계 도시들을 구석구석 내리고 뜬다.
이런 나라의 그 에너지와 순발력이 신미자를 비롯한 우리 주인공들로 하여금 언제부터 또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썩어빠진 평양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세습체제를 박차고 나와 100년 전 미국 이민사와 같은 또 하나의 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으로 핀란드로 향한다. 이들에게 신은 반드시 외면하지 않고 대성의 선물을 주시리라 확신한다.
좌파들이 세계에서 다 망하고 말라비틀어진 케케묵은 헌 고무신짝 같은 부질없는 김일성 세습주의와 행동을 가지고 어디서 끄집어내었는지, 그리고 이것으로 무얼 하겠다는 건지 대한민국은 늘 소란스럽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컬러TV로 1980년대에 우리는 이미 미국, 일본 다음으로 프로야구를 창설해서 민주시민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까지 지구촌 전 세계 방방곡곡에 우리를 보여 줄 수 있었다. 이것이 6?25전쟁을 딛고 일어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들의 작품이다.
이들을 유신독재, 군부독재 또는 건국독재라고 하는데 이들 때에 만들어진 고속도로와 새마을정신, 유신헌법은 이제 추억의 단어가 되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 사람들을 잘사는 사람들로 팔자를 고쳐 보려고 애쓴 분들이다. 이분들은 굳이 민주니 자유니 인권이니를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 수 있었고 민주스럽게 살 수 있었고 경제가 좋아지니 인권스럽게 살 수 있도록 만든 위대한 정치 발명가들이다.
여기에 나오는 우리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열심히 참 인간성을 갈구하며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다 보니 자기들도 모르게 어느 날 ‘골수 빨갱이에서 자유 민주개혁 보수주의자’들이 된 것이다. 자기들도 모르게 인간이 변하고 인간성이 개조되고 흠모하는 세 지도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운명처럼 신神이 맺어 준 인연이 된 것이다.
결국 그릇된 이데올로기는 그릇된 인간성에서 나온다. 인간성 회복이란 말이 있다. 잘못된 인간성이 올바른 인간성으로 회복되면 결국 인간은 자유가 되고 민주가 되고 인권이 되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은 지금 여름날에 때 아닌 우박이 쏟아져 귀하게 영글어 가는 농작물을 망쳐 놓았듯이 이제 막 단군 이래 5000년 빈곤과 추위와 굶주림에서 벗어나 남을 돕는 나라로 싹틀 무렵 북구라파 같은 이상적 사회주의도 아닌 국적 없는 허깨비 좌파독재와 값싼 포퓰리즘이 이 땅 위에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우리 주인공들은 이제 크고 높은 이상과 희망을 갖고 100년 전 혈혈단신으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또는 LA황무지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성공하듯이 시벨리우스의 나라에 꿈을 펼치려 북극해와 접하고 있는 유토피아 핀란드를 향하여 용감하게 떠나는 것이다. 마치 1607년 영국의 120명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긴 항해 끝에 뉴잉글랜드지방에 정착하여 오늘날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위대한 꿈을 불과 100년 만에 건설했듯이…….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신미자를 비롯한 우리의 주인공들을 하나같이 사랑한다. 야생초와도 같이 밟아도 다시 일어나고, 천야만야한 바위 절벽에 뿌리를 뻗고 휘몰아치는 바다 강풍에도 견디어 내는 해송海松과도 같은 강한 인간들이기에 더욱 사랑한다.
6?25전쟁은 동족 간에 살육을 하고 국토가 폐허가 된 전쟁으로 남은 것은 절망과 굶주림뿐이며 불구가 된 육체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뿐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치른 월남전은 전쟁을 함으로써 한국군의 현대화와 국가의 경제건설과 우리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정신적, 경제적 자산을 가져온 전쟁이었다. 여기엔 불철주야 고심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고 또 이 월남전에 직접 참여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전두환 대통령도 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하여 대학교육을 우선으로 했고 한쪽에서는 전쟁을 하고 한쪽에서는 국민들에게 면학을 독려했고 한쪽에서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아이젠하워와 맥아더 원수를 설득해서 엄청난 무상 경제원조를 획득하고 영원히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까지 했다. 이 안전한 국방외교로 그 틀 속에서 우리 국민은 문맹률이 0%인 자랑스런 나라가 되었고 마이카, 마이 홈, 바캉스, 해외여행, 주말여행을 예사로 즐기게 되었다.
모든 인문학이 그렇듯이 문학 특히 소설도 가능성의 세계를 향한 가능성의 미학美學이다. 인간에겐 할 수 없는 짓이 엄연히 있기에 인간이고 또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 그 어떤 것도 없는 가능성의 생명이기에 인간이다. 우리의 도덕과 사상이라는 것은 그중엔 할 수 없는 짓거리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지만 우리 인간의 능력의 가능성은 무한대다. 거기에 결국은 포함 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고 국가관이다.
요즘 흔한 말인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란 말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하고 정치 막료는 막료다워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 가정도 애비가 애비다울 때 자식도 자식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다운 나라가 서고 가정다운 가정이 이루어진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결혼이니 애국이니 효도니 하는 포장된 말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요즘 세상에 누구보다 인본人本을 중요시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우정을 애정으로 승화시키고, 이 원리를 국가관에 연결시킨 사람들이다.
전쟁을 겪어 보았는가?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 보았는가? 우리 주인공들은 6?25전쟁 참화 속에서도 버티어 내었고, 이역만리 월남 정글에서도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베트콩들과도 죽음의 대결을 펼쳤다. 그러고도 88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세계에서 제일 부자나라인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 낭자들이 LPGA 세계1위니 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구가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신미자를 비롯한 우리 주인공들이 모두가 ‘악바리’ 근성에 무한한 휴머니스트 유전자가 피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고 그 피는 너무나 뜨거워서 이제 동토의 나라 핀란드로 날아가 이곳에 정착한다면 이 동토의 나라 땅덩어리도 결국은 코리아의 열기로 달아오를 날이 올 것이다.
문제는 개인이고 국가고 문학이고 간에 정체되어 있으면 썩는다. 이들의 뜨거운 삶이 외치듯이 인생은 항상 승부하는 자의 편이고 강한 인생은 돌아가지 않고 질러가고 직진하고 정지할 줄을 모르는 법이다. 문학에 선과 악이 있던가? 예술이 좋은 예술, 나쁜 예술이 있던가? 모든 것은 행동 뒤에 남는 운명 같은 결과뿐인 것이 인생이고 문학예술이다. 남을 의식한 옳고 그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가는 법관도 아니고 심판관도 아니다. 오직 창작의 인간일 뿐이다. 가치가 있고 없고는, 그리고 이것이 선이다 악이다의 판단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