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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류한수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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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러시아의 전쟁>

류한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 에식스대학 역사학과에서 러시아 혁명 및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의 산업체에서 일어난 변화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럽현대사, 특히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러시아의 민족정책과 역사학》,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1》, 《서양사강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2차세계대전사》,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1917년 러시아 혁명》, 《야시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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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이콘과 도끼 1> - 2015년 2월  더보기

빌링턴이 1,000년에 걸친 러시아의 역사, 특히 문화의 발전이라는 비밀을 여는 일종의 열쇠로 본 것이 바로 이콘과 도끼였고, 그는 이 두 물품을 책 제목으로 삼았다. 그에게 이콘은 러시아 문화의 종교적ㆍ정신적 표상물인 반면에 도끼는 그 문화의 실용적 도구였다. 그에 따르면, 이콘과 도끼라는 책 제목은 “러시아 북부의 삼림 지대에 있는 농가의 벽에 전통적으로 함께 걸려있는 두 물건에서 비롯된다. 그 두 물건은 러시아 문화의 천상적 면모와 지상적 면모를 시사한다.” 러시아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요소를 이콘과 도끼라는 두 가지 물품으로 파악하는 빌링턴의 시각은 일본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요소를 국화와 칼로 보았던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의 시각과 흡사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콘과 도끼』 이전에도 적지 않은 러시아 문화사 저작이 있었으나, 대개의 경우에는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 개별 영역의 기본적 사실을 그저 시대 순에 따라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콘과 도끼』는 이런 경향을 극복하면서, 키예프 루스 시대부터 1960년대의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까지 러시아인이 가꾸고 키워온 문화를 자기 나름의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관점으로 살펴본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얻었다. 달리 말해서, 빌링턴은 통시적으로는 키예프.모스크바.성 페테르부르그로 이동하는 국가권력 중심의 변화를 씨줄로 삼으면서 이콘과 도끼로 표상되는 문명과 야만, 천상과 지상, 정신과 육체라는 상징의 보편성을 날줄로 엮어 넣어 러시아 문화사를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빌링턴이 내놓은 기본 시각은 문화를 통시성과 공시성의 조화, 변동성과 불변성의 결합으로서 역동적으로 해석하는 전략의 성공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러시아 문화의 이중성, 즉 문명성과 원시성, 유럽성과 아시아성의 공존과 충돌을 강조하는 빌링턴의 기본 시각이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러시아 문화의 이중성은 이미 19세기에는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20세기에는 러시아 구조주의 계열의 타르투 학파가 제시했던 논제이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의 이른바 내재적 관점이 제임스 빌링턴이라는 외국인 학자가 쓴 『이콘과 도끼』에 들어있는 외재적 시선을 통해 더 충실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러시아와 서방에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 문화사 연구는 이러한 이원적 접근이 약점과 한계를 안고 있다는 측면을 부각하면서 이런 점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동시에 이런 최근의 러시아 문화사 연구가 기본적으로는 빌링턴이 제시한 러시아 문화의 이원성에 관한 논의를 밑바탕 삼아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콘과 도끼』가 향후 발전을 위한 일종의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콘과 도끼』를 조금 더 상세히 들여다 보자! 빌링턴은 600쪽에 이르는 본문에서 러시아 문화의 형성과 발전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강력한 요인으로서 자연환경, 동방 그리스도교의 유산, 서방과의 접촉이라는 세 가지 힘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빌링턴이 당시의 주류적 통념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펼친 자기 나름의 주장은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통치기에 일어난 교회분열의 시작, 예카테리나 대제 통치기에 융성한 서방의 갖가지 영향력, 19세기 초에 성행한 반계몽의 특성에 관한 설명과 분석에서 특히 잘 드러나 있다. 그는 그때까지 러시아사 연구자들이 간과해온 프리메이슨의 영향과 그 비중도 부각한다. 또한 그가 러시아 사상에 푸시킨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그리 큰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고 본다는 점, 그리고 머리말의 끝부분에서, 마지막 부분 '러시아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그가 러시아 문화사를 붙이는 아교로 활용하는 인물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콘과 도끼』를 통독하는 독자라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러시아 문화의 형성과 변화에서 종교,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위상에 빌링턴이 부여하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강조이다. 그는 종교적 차원에 관한 역사학계의 관심이 모자란 탓에 러시아에 관한 이해 전체가 뒤틀린다고 느꼈고, 지금도 그렇다. 1991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역사학계에 논평을 해달라는 요청에 “거의 서른 해 동안 역사학부에서 가르치거나 역사학계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다”는 단서를 달며 조심스레 말하면서도 종교적 요소를 등한시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그의 기본 시각은 다음과 같은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분명히, 지성적 관점에서는, 만약 당신이 한 문화를, 그것도 종교가 스며 배어있는 문화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면, 당신은 제가 하는 것만큼 종교를 중시해야 합니다. 현대까지 러시아에서 종교적 요소가 강력하게 지속된다는 점은 종교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가정하는 경제결정론자와 심리역사학자, 그리고/또는 행동주의 사회과학자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미국의 역사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뒤로는 너무 자주 무시한 러시아 문화의 여러 차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그는 “『이콘과 도끼』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이 종파(구교도)에 대한 나의 매료”라고 스스럼없이 밝힐 만큼 구교도가 러시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유난히도 강조했다. 구교도 연구에 빌링턴이 품은 애착은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7세기 러시아의 구교도에 관한 연구 초안을 써놓고도 학계를 떠나 미의회도서관 관장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느라 그 연구를 마무리하지는 못했다고 애석해 하면서 “미의회 도서관의 직위에서 물러난 뒤 내게 하느님이 그럴 힘을 주신다면 그 책을 완성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는 데에서도 엿보인다. 역사의 전개에서 종교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빌링턴의 강조는 침례교 전통에 자란 아버지와 독실한 영국 성공회 신자 어머니를 둔 그의 성장 환경과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빌링턴 자신도 영국 성공회의 세례를 받은 신자이며, 그의 아들 한 명은 사제가 되었다. 한편으로, 아무리 빼어난 연구라도 취약점과 허점이 없을 수는 없다. 빌링턴이 『이콘과 도끼』에서 제시한 주장과 전개한 논지에서 미진한 구석이 없지 않은 몇몇 부분, 그리고 독자가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할 몇몇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빌링턴이 말하는 러시아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거론하는 “West”, 즉 서방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다. 흔히는 영국과 프랑스가 서방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빌링턴이 말하는 서방의 범위는 훨씬 더 넓다. 독일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까지 서방에 포함되어 논지가 전개된다. 빌링턴이 명시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지만, 러시아 서쪽에 위치한 유럽 국가를 통칭해서 서방이라는 용어를 쓰는 듯하다. 즉 흔히 말하는 남유럽, 중유럽, 북유럽이 서방으로 지칭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 동유럽 국가로 분류되는 폴란드까지 서방으로 거론되므로 혼란이 가중된다. 이런 혼란을 막으려면 빌링턴은 먼저 서방의 지리적, 문화적 정의를 내려놓고 논지를 전개했어야 했다. 둘째, 러시아 역사의 전개와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서 러시아와 서방의 접촉이라는 요인을 강조하다 보니,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서방 못지않게 영향을 준 몽골이나 튀르크에 관한 분석이 매우 빈약하며 때로는 간과되거나 거의 무시되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이런 점은 매우 큰 취약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서 서방이 준 충격과 영향을 최우선시하는 빌링턴의 기본 시각은 그가 『이콘과 도끼』를 구상하고 집필하던 1960년대까지 이른바 서방의 학계에 횡행하던 유럽중심주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미중심주의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유럽, 즉 서유럽, 특히 영국이 걸어온 역사 경로가 올바르고도 모범적인 것이고 그 밖의 경로는 이탈이거나 변형이라는 관점이 빌링턴의 기본 시각의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중심주의를 지양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콘과 도끼』를 더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더군다나 냉철한 독자라면 『이콘과 도끼』가 냉전기에 러시아의 적대 국가인 미국, 또는 서방의 시각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에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넷째, 빌링턴은 러시아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부각하는 기본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모든 역사에는 연속성만큼이나 불연속성도 있기 마련이다. 그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두드러지는 불연속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했다. 따라서 『이콘과 도끼』에는 20세기의 최대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 초기가 지나치게 소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러시아 혁명이 세계사, 특히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이런 측면은 적잖은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출간된 지 거의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빌링턴의 『이콘과 도끼』는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집어 들어야 할 필독서의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콘과 도끼』라는 역사서의 특성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 역사서가 지닌 유려한 문장과 문학적 표현력이다. 분석과 논리에 치중하는 학술서는 전문가가 아닌 독자에게는 대개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기 쉽지만, 『이콘과 도끼』 곳곳에는 마치 그림이나 사진을 보여주는 듯 선연한 서술과 묘사가 있어서 긴장감을 풀어주고 이해를 도와준다. <도끼와 이콘>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처럼 저작 곳곳에서 문학 작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탁월한 문장과 표현에 마주치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단이 그렇다. 종교적 열정이 전례 없이 만개했다는 인상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싱그러운 봄보다는 지나치게 무르익은 늦가을에 더 가까웠다. 야로슬라블에서 두 해마다 한 채가 넘는 꼴로 쑥쑥 생겨난 네덜란드풍과 페르시아풍의 화려한 벽돌 교회는 오늘날에는 비잔티움 양식과 바로크 양식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실속 없는 막간극으로, 즉 땅과 이어주는 줄기는 시들어버렸고 생명을 앗아가는 서리가 바야흐로 내릴 참임을 모른 채 10월의 나른한 온기 속에서 말라가는 묵직한 열매로 보인다. 지역의 예언자와 성자를 그린 셀 수 없이 많은 이콘이 마치 너무 익어 문드러져 수확되기를 빌고 있는 포도처럼 이코노스타시스 밑층 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동시에 빠르게 읊조리는 유료 위령제 기도는 죽음을 바로 앞둔 가을 파리가 어수선하게 왱왱거리는 소리와 닮았다. 다음과 같은 문단도 못지않게 선연하다. 예술 양식이 인민주의 리얼리즘에서 백은시대의 관념론으로 바뀐 것은 음주 취향이 더 앞 시기의 선동가와 개혁가의 독한 무색의 보드카에서 새로운 귀족적 미학자 사이에서 인기를 얻은 다디단 진홍색 메시마랴로 바뀐 것에 비길 수도 있다. 메시마랴는 희귀한 이국적 음료였는데, 무척 비쌌고 푸짐하고 느긋한 한 끼 식사의 끝에 가장 알맞았다. 백은시대의 예술처럼 메시마랴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반쯤 이국적인 환경의 산물이었다. 메시마랴는 핀란드의 라플란드에서 왔다. 라플란드에서 메시마랴는 북극의 짧은 여름 동안 한밤의 해가 익힌 희귀한 나무딸기류 식물을 증류해서 만들어졌다. 20세기 초엽 러시아의 문화는 똑같이 이국적이고 최상급이었다. 그것은 불길한 조짐이 감도는 진미의 향연이었다. 메시마랴 나무딸기가 그렇듯이, 때 이르게 익으면 그만큼 빨리 썩기 마련이었다. 한 계절 한밤의 햇빛은 다음 계절 한낮의 어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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