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정태화는 1602(선조35)년 1월 21일 정광성(鄭廣成)과 창원(昌原) 황씨(黃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양파(陽坡),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1624년(인조 1) 향시(鄕試)에서 당시 시관이었던 장유(張維)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며 급제한 이후로 1628년(인조 6, 27세)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로 두각을 드러내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인조(仁祖)조에서는 최명길(崔鳴吉)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조정의 핵심 실무행정을 익혔다. 특히 병자호란에선 김자점(金自點)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적을 방어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 1637년(인조 15)에는 특별히 승진하여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후 1638년부터는 조정의 요직들을 두루 거치면서 인조 말년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여러 차례 접반사(接伴使)로 차출되어 명·청나라 사이에서 민감한 과도기적 외교의 중심 역할을 했다.
효종(孝宗)조에서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면서 효종의 북벌정책을 도우면서 유신(儒臣)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조정에 출사(出仕)시키며 화합의 정치를 일구었다. 1656년(효종 5)에는 5남 정재륜(鄭載崙)이 효종의 넷째 딸에게 장가들고 동평위(東平尉)에 봉해지며 효종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한편 김육(金堉)과 더불어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여 민생의 안전을 기했으며 1659년(효종 10)에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朞年)으로 결정하면서, 당색(黨色)에 빠지지 않고 화합의 정치를 실현했다. 특히 청나라와의 국경 유민(流民)에서 비화된 외교문제를 거시적 관점에서 해결하는 등,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며 20여 년간 정승으로서의 임무를 마무리했다.
저서로는 1629년(인조 7)에 봉화(奉化) 각화사(覺華寺)의 사고(史庫)를 조사하고 다녀오면서 쓴 『포사일기(曝史日記)』가 있고, 1634년(인조 12)에 원접사(遠接使) 김신국(金藎國)의 종사관으로 수행하며 주고받은 시들을 수록한 『서행기(西行記)』, 1649년(인조 27)과 1662년(현종 3)의 연행(燕行) 기록인 『음빙록(飮氷錄)』,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와 현종의 즉위식 때의 일을 소상히 기록한 『기해일기(己亥日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