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은 고려 제12대 국왕 문종과 이자연의 장녀 인예왕후 이씨의 넷째 아들로 1055년 9월 28일 궁중에서 태어났다. 의천은 문종 19년(1065) 5월 14일 영통사 난원(爛圓, 999∼1066)의 문하로 출가해 화엄교학을 배웠다. 의천은 출가 이후 1985년 송나라에 가기 전까지 교장을 모으고 강론과 수학에 힘썼으며 화엄교학을 중심으로 유교나 도교까지 섭렵했다.
1085년 제자인 수개, 양변 등과 함께 송나라에 간 의천은 1085년 5월 21일 변경(?京)에 들어가 철종 황제를 만나고, 화엄종 승려인 유성, 진수 정원 등을 비롯해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을 방문했다. 의천이 송에서 폭넓게 사상을 교류하면서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사상 체계를 성립한 시기였다.
의천은 1086년 5월 29일 14개월여의 입송 구법을 마치고 교장 3000여 권을 수집해서 귀국해,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송·요·일본 등지에서 구한 제종교장(諸宗敎藏)을 간행하는 사업에 주력했다.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개창하려는 노력이 좌절되면서, 1094년 2월에는 홍원사로 옮겨 주지가 되어 교학을 강의했지만 곧 해인사로 옮겼다. 인주 이씨인 이자의, 흥왕사 지소의 세력에 밀려 해인사에 퇴거했던 의천은 숙종의 즉위 이후인 숙종 1년(1096) 개경의 흥왕사로 돌아와 주지가 되어 강학했다.
숙종 2년(1097) 5월에는 국청사가 완공되었고 흥왕사 주지를 겸하면서 천태교관을 강의했다. 이 시기 의천의 불교계에서의 역할은 화엄종과 천태종의 병립을 통해 불교계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의천은 숙종 5년(1100)에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하고, 숙종 6년(1101) 2월에는 천태종 승과 대선을 실시해서 40명을 선발했다.
의천의 활동 가운데 국가적 사업으로는 지남관, 겸제원을 복구해 백성의 편익을 도모했고, 국가의 중대사를 자문했으며, 주전(鑄錢)을 건의해 시행하는 등 숙종의 개혁 정치를 도운 것을 들 수 있다. 의천은 숙종 6년 10월 지병으로 총지사에서 사망했다. 의천의 사후, 불교계는 재편되어 그의 화엄종과 천태종 문도들은 분열했다. 이후 의천의 화엄과 천태 사상은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고, 그의 사상과 계보를 달리하는 균여계 화엄종과 법안종의 사상 경향성에 주목한 백련사 결사의 중심인물인 요세(了世)의 천태종이 고려 후기 불교계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