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핸드메이드 픽션』, 『끄라비』, 『낭만주의』, 장편 소설 『새벽의 나나』, 중편 소설 『당신의 노후』 등을 썼다. 대산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저 개인에게도 물론 영광이지만, 과학소설이 김유정문학상을 받는 장면 또한 몹시 뜻 깊은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소설은 아마도 쥘 베른 스타일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사변소설의 모범을 창조했으나 과학기술 측면에서는 큰 틀의 내적논리를 준수하는 데 그친 허버트 웰즈에 비해, 쥘 베른은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메커니즘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우리 삶의 일부가 된 것은 웰즈의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이나 투명인간이 아니라 베른의 달나라 여행, 해저 탐험, 80일간의 세계일주입니다.
후대의 작가로서, 당연하게도 저는 둘의 장점을 모두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거듭될수록 한 이야기 안에 이 두 거인을 병치한다는 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 골라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충실한 소개가 아니라 그로써 야기되는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늘 생각해왔던 터여서, 고지식한 베른보다 몽상가인 웰즈의 방식을 두세 배는 따뜻하게 만지작거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웰즈만큼 대범해질 수 없었습니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단계마다 저는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 고민하고 확인하느라 신경질을 부렸고, 그러는 동안 이 소설에 담겼어야 할 낭만의 상당량을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쥘 베른이 보다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던 바로 그 좌뇌의 유령에게 저 역시 발목을 잡혔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과학 수준은 쥘 베른 시대의 과학 수준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복잡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외삽한 미래의 모습도 쥘 베른이 상상한 미래의 모습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오늘날 과학소설이 사건의 발생가능성을 정직하게 설득하려면 독자를 좀 고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할 제 입장에서는 꽤 난처한 일입니다.
그래도 이대로 열심히 가다보면, 언젠가는 두 선배 사이에서 그럴듯한 접점을 찾아내리라고 별 근거 없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 상을 한 번 더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2016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