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0~168) 중국 전한(前漢)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낙양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시서와 작문에 능했다. 18세가 되던 해 하남군의 태수 오공(吳公)이 그를 발탁해 문하에 두고 총애했다. 문제 즉위 초에 오공이 정위의 자리에 오르면서 오공의 추천으로 가의는 장안으로 가 22살에 역대 최연소 박사(博士)가 되었다.
박사가 된 가의는 전한 조정에서 천재성을 발취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문제의 신임을 받은 가의는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태중대부(太中大夫) 직에 올랐다. 이 해에 가의는 황제에게 <논정제도흥예악소(論定制度興禮樂疏)>와 <논적저소(論積貯疏)>를 올려 현실 정치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문제 2년에는 진의 실패를 거울 삼아 선정과 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과진론>을 썼다.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하고 있던 현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 그는 역법, 복색, 관직 제도와 법을 개정하고 예악을 부흥시킬 것을 제안했고 문제는 가의의 제안 중 일부를 채택하고 그를 공경(公卿)직에 임명하려 한다.
그러나 가의의 재능을 시기하던 공신들의 반대로 그는 장사왕의 태부로 좌천된다. 1년이 지난 후 문제는 좌천 후 힘든 시기를 보내던 가의를 다시 불러 시정을 논하고, 양회왕 태부로 발령한다. 이 해 그는 황제에게 <논시정소(論時政疏)>를 올렸다. <논시정소>는 <진정사소(陳政事疏)> 혹은 <치안책>이라고도 불리는데, 후대에는 주로 <치안책>으로 불렸다. 그러나 양회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낙마(落馬)로 사망하자 가의는 태부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통감하고 1년여 동안 곡읍(哭泣)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애도 끝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