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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웠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이어 함경도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에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해 출사했다. 이후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 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해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하고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가 되어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명나라에 사은(謝恩) 행차를 다녀왔다. 이 사은사 행차가 빌미가 돼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寓居)하다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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