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어설픈 장돌뱅이였던 나는 폐차 직전의 차를 끌고 장을 찾아다녔어요.
무주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사방이 깜깜하고 집으로 가는 길엔 오직 달빛만이 함께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조수석 아래서 하얀 연기가 마술 부리는 것처럼 꾸역꾸역 올라오더니 온도계기판이 끝을 달리고 있습니다.
겁이 더럭 나 차에서 내려 연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다 차의 이곳저곳을 열어보다 방열기에 물이 없음을 확인하고 달빛이 비치는 논둑길 아래로 물을 찾아다녔습니다.
개울물을 담아 방열기에 붓고 다시 달리는데 좀 전처럼 또다시 차 안 가득 연기가 차오르고 또 달리다 보면 같은일이 반복돼 가다 서기를 계속하면서 물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때마다 인적 없는 밤길에 달빛이 함께해 무서움을 참았는데 멀리 불빛이 보이는 외딴 동네가 얼마나 따스해 보이던지 낯선 도시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에게 더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달빛은 몸과 마음이 지쳐 돌아가는 옥탑방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는 달. 오늘은 달이 신호등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전화기 너머로 지금 옥상에 올라왔는데 오늘 달빛이 환해요. 거긴 어때요.
- 여기도 그래요.
- 우리 지금 같은 달보고 있는거 맞지요.
언젠가 나는 달이 참 고마워요. 하고 그날 일을 들려주자 고마워라, 저 달빛. 하는 그녀는 내 친구 이승채입니다.
9년 전 처음 만난 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도 들지 못하고 어찌나 수줍어하는지 땅만 바라보고 말을 했어요.
내가 장에서 돌아와 고단한 몸을 접고 달빛 앞에 앉았을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끝낸 서울에 사는 그녀는 충청도 작은 읍내에 살고있는 내게 날마다 전화를 했습니다.
글로 못다 한 말 마음 속에 담아놓은 아픈 이야기는 모두 나한테 다하고 앞으로는 슬프지도 말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어느날은 이야기 끝에 사실 오늘 내 생일이었어요. 하니 두 시간 후 전화가 왔는데 집 앞이라며 빵집이 문닫을까봐 가슴조리며 왔다고 내게 케이크를 건넸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 없으면 우리 못만났을 거예요.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남편에게 친구만나고 온다고 했으니 바로 돌아가야해요. 했어요.
주변의 친구들이 둘이 연애하느냐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 처음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다하고 보잘것없는 사람, 그리 귀히 여기는 사람 못 봤고 기운 잃어가는 내 이야기에 한없이 귀 기울여주는 시처럼 고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도 나처럼 레오나드 코웬의 노래를 좋아했고 꽃을 좋아했고 비를 좋아했고 시를 좋아했습니다.
우체부아저씨, 똑바로 세워주세요. 나는 꽃입니다. 아니면 꽃이 아파해요. 하는 택배가 파장하고 돌아오면 집 앞에 자주 놓여있었습니다.
그녀가 늘 이야기 합니다.
이제 그만 힘들게 일하고 장에 가는 일 접었으면 좋겠어요. 여름이면 얼마나 더워요. 겨울이면 얼마나 추워요. 그 심술 맞은 바람은 다 어쩌고, 길 위에 있는 나를 걱정 하던 그녀.
그게 안 된다면 삼일만 장에 나가고 이틀은 집에서 쉬고 다시 삼일 나가고 이틀은 집에서 쉬고 해야지 365일을 그렇게 일을 하면 사람이 어찌 사느냐고…….
아직은 그렇게 하면 생활이 안된다고 하니…. 어떻게 해요. 나만 편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내게 미안해할 일은 하나도 없는데 자주 미안하다고 했어요.
어느날 왜 글 안 써요? 묻는 그녀에게 글이 안 써져요. 가슴에 담아놓은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다행이다. 그거 좋은 거지요. 더 슬퍼할 일이 없다는 거잖아요. 아플 일이 없다는거지요. 그런데 이거 아나 몰라요.
나 독자로 영원히 남고싶은데, 글 계속 써요. 이제 나한테만 들려주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들려줘요. 하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녀를 만나고 처음 해본 것도 가본 곳도 많았습니다.
인사동 골목골목, 명동, 예술의 전당, 수목원, 언제나 좋은 음식점을 예약해놓고 나의 뼈마디가 굵어진 손을 잡고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요. 미안해요. 를 자주했던,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귀히 여겨주었던 그런 그녀가 깊은병에 걸렸습니다.
세상이 정지된 듯 여름이 고여 있었고 도무지 가을이 찾아올 것 같지 않은 더위가 여전한 9월에
나, 병들어서 미안해요. 하더니 그녀는 내 손을 놓고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왜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나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가을이 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고운사람도 사는구나 했던,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도 있구나 했던 선물같은 그녀의 이름은 이승채입니다.
낯간지러워 꺼내지 못했던 말을 스스럼 없이 꺼내게 하던 사람.
사랑해요. 사랑해요. 승채씨.
이 책을 사랑하는 승채씨에게 바칩니다.
이 책을 달빛이 필요한 사람에게 바칩니다.
2015년
달빛 쓸쓸한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