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초에 <퀴즈 아카데미>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학생 두 명이 한조가 되어 5연승을 하면 유럽여행권을 상품으로 내건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퀴즈 중에는 한 명이 답을 미리 보고 이를 설명하면 다른 한 명이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 있었는데, 당시 정답이 <바르셀로나>였다. 그런데 이를 본 한 친구가 <스페인의 수도는?>이라고 질문하니, 다른 친구가 <바르셀로나>라고 해서 정답을 맞히는 것이었다. 아마 당시 19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백주년 기념)을 앞두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스페인의 수도는 당연히 올림픽이 개최되는 바르셀로나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스페인이 프로축구와 관광대국으로 한국인에게 분명히 각인된 요즘 이러한 상황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필자의 전공학과는 <서어서문학>이었는데, ‘서어’라는 언어가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분이 많았다. 한자어인 ‘서반아어’, 영어인 ‘스페인어’, 스페인 원지음인 ‘에스파냐어’를 각각 다른 언어로 아는 사람이 더러 있어 세 단어가 모두 똑같은 언어를 뜻한다는 설명을 해야 했던 적이 많았다. 한자어인 서반아어(西班牙語)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스페인어에 대한 중국어 발음의 차용 한자어이다. 마찬가지로 아래 사진에서 보면, 중국어로 독일어는 德語(덕어), 프랑스어는 法語(법어)이다.
그만큼 필자가 학창시절을 보낸 80~90년대에는 스페인, 중남미, 스페인어가 생소하였다. 스페인어가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18개국의 공용어이며, 미국에서는 영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제1외국어란 사실을 얘기해주는 것이 대단한 지식인 양 뽐낸 시절이었다.
그러나 정보로 넘쳐나는 IT 시대에, 외국여행을 안 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외국여행이 보편화되고 스페인 투어가 유럽여행의 대세가 된 지금(예를 들어, 스페인 관광청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동안 스페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 수가 32만 명에 이른다), 스페인의 수도는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마드리드이며, 스페인어가 어느 나라에서 모국어나 제1외국어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적다. 게다가, 이제 스페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페인에는 스페인어 이외에도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와 같은 지역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스페인에는 우리나라 못지않은 지역주의가 뿌리 깊어 ‘엘 클라시코(El Cl?sico)’라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와 FC 바르셀로나(F.C. Barcelona)의 시합이 왜 스페인 프로축구 라리가(La Liga)의 빅매치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스페인어권 세계의 이해는 피상적인 면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중남미 18개국에서는 스페인어만을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페인 북부 및 동부지역의 몇몇 자치주(갈리시아, 파이스 바스코,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가 이중언어 상황에 놓여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남미(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도 마야어, 나우아틀어, 케추아어, 아이마라어, 마푸체어, 과라니어와 같은 원주민 토착어가 스페인어와 함께 사용되는 이중언어 지역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스페인어권 세계에서의 이중언어 현황에 대하여 역사적 맥락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두고자 한다. 이 책은 필자가 그동안 10여 년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해 온 <스페인어의 세계>라는 전공탐색 교과목의 강의록에 기초하여 집필되었다. 따라서 이 책도 전공탐색 강좌의 취지에 맞게 그 내용과 형식이 전개될 것이다. 즉, 스페인어라는 언어적 관점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 교양적인 측면에도 초점을 맞추어 스페인어와 스페인어권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가 좀 더 쉽게 해당 주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책에서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다룰 것이다. 첫째, 언어적 접근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스페인어가 스페인, 중남미, 미국 등 지역별로 지니는 다양성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는 스페인과 중남미 국가에서의 다양한 스페인어 방언, 주변 지역어와의 언어접촉에 따른 스페인어의 다양성, 미국에서의 스페인어(스팽글리쉬)와 코드 스위칭 현상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둘째, 역사적 접근을 통해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언어상황과 언어정책을 통시적으로 개괄할 것이다. 이중언어 상황에 놓여있는 스페인과 중남미 스페인어권 국가의 언어정책을 인권과 다문화적 관점에서 국가별로 연구함과 동시에,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언어사용 현황을 분석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스페인의 이중언어 지역인 갈리시아, 카탈루냐, 파이스 바스코 지방과 중남미 국가 중에서도, 원주민어가 활발히 사용되는 국가인 볼리비아, 파라과이, 멕시코, 페루, 칠레를 중심으로 각국에서 스페인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소수언어가 제도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다문화 사회에서 정부가 어떻게 이들 소수언어 화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이들 소수언어 화자의 인권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를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를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에서 다룰 구체적인 주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스페인과 중남미의 언어상황과 언어정책을 다룰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갈리시아, 카탈루냐, 파이스 바스코와 같은 이중언어 지역의 언어상황과 스페인의 언어정책을 다룰 것이다. 특히, 분리독립 문제로 스페인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카탈루냐 자치주의 언어정책과 언어상황을 좀 더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중남미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다문화?다언어 국가들을 선정하여 이들 국가에서의 언어상황에 대한 사회문화적 실태를 조사할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백인 화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형성한 사회에서, 소수언어이며 피지배언어인 원주민어를 구사하는 화자가 겪고 있는 인권유린이나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적 문제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는 볼리비아(아이마라어), 파라과이(과라니어), 멕시코(나우아틀어와 마야어), 페루(케추아어), 칠레(마푸체어), 그리고 카리브해 국가(크레올어)가 해당되겠다. 둘째, 다문화?다언어 상황에 처해있는 중남미 국가 정부가 채택하고 있는 언어정책에 대한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하여 중남미 국가의 원주민어, 원주민 문화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주민어에 대한 언어정책 변화에는, <단일 문화주의>(하나의 언어로 통합된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입장), <다문화주의>(원주민어를 인정하되, 스페인어권 사회로 동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입장), <다원적 문화주의>(인권보호라는 측면에서 원주민어를 인정하며, 언어의 다양성을 지키고 원주민 문화를 보호하려는 입장)라는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예정이다. 셋째, 스페인과 중남미 각국의 언어상황과 소수언어 보호정책을 고려하여, 스페인과 중남미의 소수언어가 어떠한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 그 전망을 살펴볼 것이다.
이 책은 특정분야를 심도있게 다루는 전문적인 학술서라기보다 스페인어권 세계의 언어상황과 언어정책을 소개하는 언어문화 분야의 교양서에 가깝다. 해당 주제에 관심이나 궁금증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대부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책과 같은 언어문화 교양서를 집필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이 스페인어권의 세계에 보다 폭넓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먼저, 한국에서는 중남미를 연상하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만 떠올리지만,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이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둘째, 스페인과 중남미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한국과 스페인, 중남미 각 국가 간의 진일보된 문화적 교류와 앞으로의 경제적 투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을 지원해주는 국가로 부상한 현재,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이 우리나라의 주요한 경제 협력국가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본 연구에서 지향하고 있는 스페인과 중남미 각국의 다문화?다언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과 스페인?중남미 국가 간의 경제?문화 교류에 생산적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게다가,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더 이상 단일민족, 단일언어 사회에 머물고 있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다언어?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해가 지날수록 다방면에서 외국 이민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다문화 가정 역시 급증하고 있다. (이제는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거나 외국어를 듣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요즘은 TV 프로그램에서 접할 수 있듯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모두 동일한 잣대로 평등하게 대하고 있는가? 백인들에게는 저자세이면서,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에게는 고자세로 업신여기면서 우리 사회에서 소외시키지는 않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소외된 계층의 인권보호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폭넓은 이해 측면에서도 이 책이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책이 발행되기까지 많은 분의 도움과 성원이 있었다. 먼저, <스페인어의 세계> 수업시간에 주제별로 성실히 발표와 토론에 참여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학생들의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주제발표가 수업을 더욱 더 활기차게 했음은 물론, 이 책의 집필에도 큰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지난 2년간 소중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보내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매번 기꺼이 출판의 기회를 마련해 주신 한국문화사에 감사드린다. 끝으로 중남미의 언어상황과 언어정책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신 Claudia Macias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독자의 관점에서 이 책의 원고 전체를 면밀히 읽고 윤문과 교정을 봐준 송예림 박사와 안다희 양 그리고 최희중 군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