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개신교 사상가인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네덜란드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학자이자 목회자, 교육행정가였으며,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네덜란드 최초의 정당인 반혁명당과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교 그리고 개혁교회를 창설했다. 그는 1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리울 만큼 천재적이고 위대한 사상가였고 실천가였다.
그의 사상은 일반은총론과 영역주권 사상으로 대표되며, 프랑스 혁명의 무신론 정신에 맞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반혁명적 정치 운동을 펼쳤다.
카이퍼 박사는 1837년 네덜란드 항구 도시 마아스슬라이스에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0년 23세에 흐로닝헌 대학 현상논문에 응모하여 최고상을 받았고, 1862년 25세에 레이던 대학에서 ‘요한 칼빈과 존 아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63년 26세에 결혼하고, 베이스트교회에서 4년간 목회했다. 1867년에 우트레흐트 교회에서 3년, 1870년에 암스테르담 교회에서 4년간 목회했다. 1871년에 주간지 “드 헤라우트”(De Heraut) 편집장, 1872년에 일간지 “드 스탄다르트”(De Standaard) 편집장에 취임했다.
1874년 37세에 하우다 지역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878년 41세에 반혁명당 당수가 되었다. 1880년 43세에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을 설립했다. 1892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설립했으며, 1898년 61세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1년 64세에 네덜란드 수상이 되어 1905년까지 국가경영의 책임을 다했으며, 1916-1917년에 《반혁명 국가학》(Antirevolutionaire Staatkunde)을 집필했다. 그리고 3년 후 1920년 83세에 헤이그에서 주님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