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파리 근교 메종 라피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889년 49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자살하였다. 1907년 세 번째에 걸쳐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낙방하자 학업을 포기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상류사회에 적을 두고 다수의 문인, 예술가와 교류했으며 1908년 최초로 자신의 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1909년 20세의 나이에 출판된 처녀시집 『알라딘의 램프』로 일약 시대의 총아가 된다. 그해 잡지 《셰에라자드(Scheherazade)》도 창간한다.
1919년 시인 레몽 라디게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그와 함께 잡지 《수탉(Le Coq)》 등을 창간하며 예술적 작업에도 서로 영향을 미친다. 1923년 레몽 라디게 사망 뒤 아편에 빠지는 등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가톨릭에 의지하기도 한다.
이후 전방위에서 정력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며 연극, 음악, 그림, 영화 등에서도 다양한 재능을 발휘한다. 1936년에는 친구 마르셀 킬과 함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실행에 옮겼다.
1950년 영화 <오르페우스>로 베니스 국제 비평가상 수상, 1951년 작사ㆍ작곡가 조합 대표 선출, 1953년 칸 국제 영화제 배심원 의장, 1955년 벨기에의 프랑스어문학 아카데미 및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 1956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수여, 1957년 뉴욕 예술문학연구소 명예회원이 된다. 1952년에는 뮌헨에서 최초의 그래픽 및 회화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고전과 전위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꿈과 현실, 질서와 무질서 등이 표리일체가 된 수많은 명작을 남기며 왕성한 활동을 하다 1963년 사망한다.
80일! 우리는 이 여행 일정이 1876년에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1946년에는 지나치는 항구마다 들러 한가로이 머물기도 하는 유유자적한 산책이나 다름없으리라 생각했다. 「파리-수아르」의 편집장 장 프루보스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정표를 작성했다. 신문사는 그 유명한 '80일'이 단순한 이야기나 망상이라기보다는 쥘 베른이 착상한 축음기, 비행기, 잠수함, 잠수부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작이 주는 설득력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