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창 시절부터 펄프매거진에 작품을 싣다
펄프 소설의 전성기를 이끈 작가 중 하나인 노버트 데이비스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던 학생이었을 때부터 여러 잡지에 소설을 팔았다. 그중에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하드보일드 잡지 《블랙 마스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훗날 데이비스는 대공황 때문에 어려웠던 이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잔디를 깎고 차를 닦고 모래를 퍼서 날라 봤고, 성실히 노동하는 삶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내 타자기로, 종이 위에서.” 이 무렵 쓰인 작품 중 1934년 《블랙 마스크》 2월호에 실린 「레드 구스Red Goose」는 훗날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신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 꼽은, 독특한 소설이다. 펄프매거진에 글을 실으면서 나름의 성공을 맛보고 있던 데이비스는 1934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 시험을 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2. 하드보일드의 성지, 로스엔젤레스에서의 나날들
데이비스는 이곳에서 다른 펄프매거진 작가들과 함께 ‘픽셔니어즈Fictioneers’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멤버들은 서로 이런저런 도움을 나누며 함께 술을 즐기던 사이였다. 레이먼드 챈들러도 이들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때 데이비스와 챈들러는 한동네에 사는 이웃이기도 했다.
비교적 젊었을 때부터 펄프매거진 업계에서 입지를 굳힌 데이비스는 점차 커리어의 변화를 꾀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940년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몇몇 하드커버판 단행본도 냈는데, 평은 좋았지만 판매량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주는 슬릭매거진에 러브스토리 작품 등을 실으면서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듯이 보였지만 점점 일이 잘 안 풀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사치가 심했던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뒤 낸시라는 작가와 재혼한 상태였는데, 데이비스와 반대로 그녀는 슬릭매거진 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생전에 데이비스는 하드보일드, 서부극, 로맨스 등 장르를 불문하고 200여 편의 글을 잡지에 실었을 만큼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그리고 펄프매거진은 상대적으로 돈을 적게 지불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작품을 써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40년대에 들어 펄프매거진 시장도 조금씩 붕괴해 갔고, 이 업계 외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던 데이비스는 심리적, 물질적으로 위기 상태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3. 너무 이른, 마흔 살의 고독한 죽음
1949년에 데이비스와 낸시는 코네티컷으로 이사를 갔다. 아마 낸시가 뉴욕 출판사들과 더 가까이 있기 위해 권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해 7월, 데이비스는 홀연히 휴양지인 케이프코드로 떠났다. 그리고 자동차에 호스를 연결한 다음, 머물고 있던 곳의 욕실로 끌어왔다. 그는 그곳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왜 데이비스가 자살을 선택했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이때 그가 소유한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고, 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던 등 이런저런 나쁜 상황들이 겹쳐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