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강화군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신학과) 및 대학원 졸업.
과천교회, 천곡교회, 매원교회 담임목사 역임.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한 모임’ 초대 이사장 역임.
수원지역 경실련 공동대표 역임.
저서 <종점에서 가는 길>(신앙과 지성사, 2001),
<장미와 예수>(신앙과 지성사, 2016),
<사랑으로부터의 재창조>(문학과 사람, 2017)가 있음.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불행하다”는 모진 말이 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행복하냐는 크로이서스(Kroesus) 왕의 질문에, 현자 솔론(Solon)은 “죽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썰렁한 대답을 한다. 삶 자체가 불행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선뜻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아니라는 반론을 펴기도 어렵다.
주어진 상황이 힘겨워서 어찌할 방법을 모르며, 자신의 삶을 남의 일처럼 방치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남의 것처럼 네 가지 고통(四苦)이니 여덟 가지 고통(八苦)이니 하면서, 살아가야 할 자기 자리를 고통의 바다(苦海)라며 남의 얘기하듯 한다.
그래서인가. 경험하는 일들마다 회한과 상처와 얼룩만 남기니, 사람들은 세상을 어렵게만 바라보는 습성이 생겼다. 매사에 성큼 나서기가 두렵기만 하다. 하나의 회한을 또 추가할까 두려운 거다. 습성을 지나 체질이 되다시피 하면서 자기가 살아야 할 세상사를 남의 말 하듯 한다. 계속 그런다면 이 세상은 누가 살아주나?
하느님을 경험하는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어렵고 어둡고 무섭고 딱딱하기만 하다. 하느님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고 분위기를 살펴야 하고 눈치를 보며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 결코 하느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살아가는 현실이 어려운데 하느님 경험조차 이렇게 힘겨워야만 하니, 인생길이 꼭 이런 식이어야만 되는가? 그렇다고 하느님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릴 만큼 배포가 두둑한 것도 아니니 마땅한 방안은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어차피 살아야 할 삶이라면 모든 걸 힘들게만 바라보는 몸에 밴 관점에서 잠깐 비켜서서 새로운 각도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안(案)을 만들어보고 싶다. 같은 산이라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마치 다른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각(視角)을 달리해서 관점을 바꾸면 세상 모습이 새로워지는 일을 종종 경험한다.
관점을 바꾸면 전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한다. 또 관점을 바꿔서 자신을 바라보면, 오리무중이던 자신의 정체성이 또렷하게 정리되는 감동적인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성서를 읽는 일도 마찬가지다. 관점을 바꿔서 다가가면 전혀 새로운 세계로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 성서를 기록하거나 편집한 사람들의 의도를 잘 파악해서 죽이 맞는 필자와 독자관계를 만들어서 “성서야, 놀자!” 하는 방식으로 읽어보자는 제안이다. 제발 동문서답식 미신적 성서 읽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성서가 품고 있는 본래의 관점을 따라서 그것이 일러주는 원리를 살피면서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고, 그리고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방안을 찾아보고 싶어서 라는 피켓을 들고 길을 나섰다. 길동무도 여럿을 만났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이것은 세례를 받고 강변으로 올라온 예수의 귀에 들린 하느님의 음성이었다. 예수의 눈에는 비둘기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이 소리와 그림은 예수가 그때 그곳에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시대의 서술방식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더라도, 그 사실을 당사자인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본인의 각성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 사실은 예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아들 의식(意識)을 가지고 아들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이 아들이면서도 노예 의식(意識)을 갖고 노예로 살아가는 아들이 많다.
이것이 성서가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중심 내용이다. 성서는 우리 모두가 노예의 삶에서 뛰쳐나와서 아들의 삶으로 뛰어들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필자는 스스로 독자(讀者)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향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자신에게 써 보내는 지난날의 회고문(回顧文)이며 살아갈 날들에 대한 마음의 다짐을 다듬고 있다. 서툰 글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경험하는 일들이 더러 있어서, 부족하나마 의미를 느끼면서, 이런 내적 경험은 나눠가지면 좋겠구나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를 명확하게 정리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를 아는 것은 모르고 사는 것과는 다르게 살아 있는 감각을 새롭게 해 준다.
늘 가까이 지내면서 구도(求道)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고마운 길동무들의 요청과 격려가 이 글을 정리하도록 밀어주는 동력이었다. 아내 또한 말없는 요청과 응원으로 이 글을 시작하도록 등을 밀어줬다.
특별히 자신의 일보다 더 걱정하며 일을 추진해 준 문 선생, 그리고 일마다 흔쾌히 도움을 주는 박 사장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 십년지기처럼 마음 가까이에서 이 일을 도와준 의 김광기 시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7년 5월 일흔일곱 번째 생일에, 김진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