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치하에서도 신앙적 양심을 지키며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요, 윤리학자, 복음주의 설교자.
1908년 12월, 독일 부퍼탈 바르멘에서 태어나 칼빈주의적 청교도 신앙의 전통 속에서 자랐다. 스무 살 무렵에 독일 보수 신학의 본산지인 그라이프스발트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부르크대학교, 본대학교, 에를랑겐대학교 등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이어 나갔다. 그는 호흡장애를 일으키는 갑상선종으로 인한 고통과 심각한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학문에 정진했으며, 마침내 에를랑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잔인한 통증으로 몸부림치며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은 바로 그 순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며 기적과도 같은 치유를 경험했다. 이 사건은 그가 매우 실존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신학을 고수하게 된 계기가 된다. 뒤이어 그는 에를랑겐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특히 그는 기독교 윤리학과 교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35년에 에를랑겐대학교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고백교회 활동을 이유로 나치가 방해해 교수직에 오르지 못한다. 이듬해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강단에 섰으나 계속되는 방해 공작으로 결국에는 1940년에 해임되고 만다. 그는 나치가 몰락하는 1945년까지 슈투트가르트 슈티프트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펼쳤으며, 수많은 독일 성도들이 그의 설교로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그는 독일 대중이 깊이 사랑한 설교자였고 “스펄전 이후 가장 뛰어난 설교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가 교회 담장을 넘어 시대의 문제와 아픔에 열린 마음으로 동참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튀빙겐대학교의 교수로 강단에 복귀해 조직신학을 가르치다가 총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함부르크대학교에 신설된 신학부의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몇 년 뒤 개신교 신학자로는 최초로 이 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함부르크 성미하엘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섬겼는데, 당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다양한 인종과 계층을 뛰어넘어 매주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1956년부터는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라틴아메리카 등을 다니며 강연과 설교 활동을 했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 《현실과 믿음 사이》, 《신과 악마 사이》, 《기다리는 아버지》,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성 윤리학》 등이 있다. 1986년 3월 5일에 함부르크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