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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동(張之洞)청나라 말기 양무파 관료.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과 함께 청말 4대 명신으로 꼽힌다. 1863년 전시에서 3등으로 진사로 급제하여 한림원 편수에 제수된 후, 양광(광동성과 광서성) 총독, 호광(호남성과 호북성) 총독, 양강(강남성과 강소성) 총독, 군기대신, 본인각 대학사 등을 역임했다. 공직 진출 초기에는 이홍장 등 양무파를 비판했으나, 1881년 산서순무 시절부터 양무파로 입장을 전향해서 후기 양무파의 주요 인사가 되었다. 재임시절 교육과 치안에 주력했고 근대적 경찰제도 수립을 주도했으며 실업 진흥에도 힘썼다. 특히 1890년대 중반 양무인재 육성을 위해 농업, 공업, 상업, 외국어, 사범 등 분야의 신식학당을 다수 설립했고 일본·영국·프랑스·독일 등지로의 유학생 파견을 주도했다. 양광, 호광 총독시절 유신인사에 호감을 느껴 중용했지만 후에 유신 세력이 성장하자 이들과 갈라섰다. 1895년에 『권학편』을 써서 반反유신의 입장을 표방하고 양무파의 의견을 대변했다. 1901년 청말 신정의 주요 정책을 입안했고, 1903년엔 일본학제를 모방한 근대적 학제인 계묘학제癸卯學制를 설계했다. 1909년 문양공文襄公에 시호를 받았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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