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시가,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슴에 품은 채 몇 구비의 고단한 현실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발을 헛딛고 마음을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이 휘황한 자본의 시대에 시가 과연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 시보다 훨씬 직접적이고도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무기’를 벼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고, 시를 기꺼이 ‘포기’했지만 결코 후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지요. 나는 시를 외면하고 살아왔지만 시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난한 싸움과 잦은 패배 과정에서 투혼도 신념도 무뎌질 때쯤 어느 날 불쑥 시가 나를 다시 찾아왔던 것입니다. 고맙고도
미안했습니다. 오래 된 시작(詩作) 노트를 다시금 꺼내 들고 시효 지난 시들을 묘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공할 야만의 시대를 온전히 견뎌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시와 문학에 빚진 것이 많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후 삶과 문학이 일치하지 않는 시인은 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현장에서, 일상에서 틈틈이 끄적거렸던 시들을 모아 세상의 허다한 시집 더미 위에 한 묶음의 부끄러움을 보태고자 합니다. 성취의 자부는 적고 부끄러움은 많습니다.
끝으로 늘 옆에서 응원해 준 후배 상훈, 효운, 혁재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언제나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 온 믿음직한 동생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들과 함께여서 쓸쓸하지 않았고 여전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올연(兀然)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