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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외저자 > 문학일반

이름: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

국적:유럽 > 중유럽 > 독일

출생:1893년 (사수자리)

사망:1939년

최근작
2019년 7월 <변화>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독일과 폴란드 국경 지대에 있는 포즈난(Poznan) 지방의 사모친(Samotschin)이라는 한 소도시의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여러 인종들과 민족들 사이에서 국적과 인종의 장벽에 시달렸다. 이때부터 톨러는 소수민족에 속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으며, 항상 자신을 예외적 존재 또는 아웃사이더로 생각했다. 때문에 독일계 유대인 톨러는 끊임없이 자신을 내쫓는 독일 민족 공동체에 완전히 편입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된다. 1914년 프랑스의 그르노블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톨러는 독일로 돌아가, 갑자기 모든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부정하는 조국을 위해 싸우고자 뮌헨에서 자원입대한다. 1915년 톨러는 프랑스 전선에 지원한 후, 참호전에 투입되어 집중포화 속에서 정찰 근무를 수행한다. 이때의 체험이 톨러를 작가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전쟁이 야기한 수백만의 반자연적인, 집단적인 죽음을 목도한 톨러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겪는다. 참혹한 전쟁의 현실은 애국자의 고상한 꿈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톨러는 그의 애국심에 큰 충격을 준 참호 근무 시의 끔찍스러웠던 체험을 결코 잊지 못한다. 참호 앞에서 사흘 밤낮을 철조망에 매달려 끊임없이 도움을 절규하던 한 부상병의 모습과 우연히 발견한 참호 속의 시신이 톨러가 전쟁에 열광했던 국수주의자에서 반전 및 평화주의자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전쟁 체험으로 톨러는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고, 모두들 전쟁에서 의미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학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로써 열광적인 민족주의자가 평화와 형제애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반전주의자로 변한 것이다.

1년여를 전선에서 머무른 후 톨러는 심한 위장 장애 및 심장병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는다. 제대 후 그는 학술 및 예술 활동에 전념함으로써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 후 톨러는 인류의 역병(疫病)으로서의 전쟁과 자본주의, 현대전의 원인으로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그리고 사회정의와 국제간의 이해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평화주의적 세계시민의 길을 간다. 이후 뮌헨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던 무렵 베버(Max Weber), 란다우어(Gustav Landauer)의 영향을 받아 톨러는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반전주의자가 되어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과 함께 독일청소년문화정치동맹을 결성한다. 나아가 톨러는 베를린에서 독일 독립사회주의당의 당수인 아이스너(Kurt Eisner)를 알게 되어 열렬한 그의 신봉자가 된다. 그는 아이스너를 따라 뮌헨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파업 선동 혐의로 1917년 체포되어 군 형무소에 수감된다. 감옥에서 자신의 개인적 변화가 전 인류의 변화로 널리 파급되는 과정을 드라마화한 작가는 자신이 형성한 극적 줄거리를 앞으로의 생애를 통해 직접 입증해야 했다. 톨러는 1918년 여름에 석방되어 1919년까지 바이에른 인민공화국에 참여한다.

1919년 2월 아이스너가 살해된 후 톨러는 바이에른 노·농·병 혁명위원회 중앙위 의장이 되고 4월에는 붉은 군대의 다카우(Dachau) 지역 사령관이 된다. 이 무렵 분열된 사회주의 진영 내의 권력 투쟁에서도 톨러의 주요 관심사는 항상 유혈을 막는 일이었다. 톨러는 항상 “우리는 보다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인간성을 요구하고, 우리는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폭력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독일제국 국방군인 백군 포로들을 사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들을 풀어주었다. 패배한 적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것이 혁명의 미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폭력을 저지코자 했다. 결국 톨러는 여섯 명의 백군 포로들의 탈출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대역죄로 고발되어 군사재판에서 5년 동안 성채 구금 판결을 받게 된다. 톨러는 이때 니더쇤펠트(Niederschonfeld) 성채에서 <대중 인간>, <기계 파괴자>, <힝케만> 등 그의 주요 드라마들을 완성한다.

1924년 성채에서 석방된 후에도 톨러는 정치적 연설과 저술 등을 통해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 투쟁을 계속한다. 1920년대 말 소련을 방문했을 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톨러는 1930년 미국에 갔을 때는 미국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그럼에도 1933년 톨러는 히틀러의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려 했지만, 그곳 사회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좌절감, 연하의 여배우와의 결혼 실패 등으로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며 유랑자 생활을 계속한다. 결국 창작의 불씨마저 꺼져 가는 데 절망한 나머지 1939년 뉴욕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목을 매 자살함으로써 영욕에 찬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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