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경상대학교 철학과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 Div)를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기독교상담학으로 박사(Ph. D)를 마쳤다. 대학시절에는 진주 지구 CCC에 헌신하여 전도와 제자 삼는 일로 캠퍼스에 헌신하였다. 제자 삼는 사역 중에 나타나는 사람이 지닌 개인적 특성들을 경험하면서 대학 시절부터 그리스도인의 내면적 삶에 관심이 있어 왔다.
졸업 후 상담심리학회 수련감독자로부터 97년부터 3년 간 분석을 받고 개인 상담과 집단 상담을 20년 넘게 현장에서 해오고 있으며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평생 교육원 등에서 강의를 해왔다.
현대 심리학의 여러 진리의 조각들을 신학체계에 적절하게 접목할 수 있을지를 오랜 세월 고민해왔다. 신학이 풍부한 경우, 심리학적 이해가 부족하고 심리학적 지식이 많으나 신학적 이해가 부족한 경우를 수없이 보면서 종교개혁의 후예들에게 걸맞게 제대로 된 신학체계를 반영한 심리학적인 신학을 고민해왔고 소기의 결실을 이뤘다. 저자는 이 책이 성화 없는 삶을 고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되길 소망하고 있다.
왜 성화는 공동체적일까?
보통 믿음은 개인적인 일로 이해가 된다. 실제로 독일의 개인주의는 루터 신학과 함께 발달했다. 그런데 성화는 공동체적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인간의 거룩함과 관련하여서 성도라는 표현을 쓰는데 거룩할 ‘성(聖)에 무리 ‘도(徒)를 써서 개인이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를 묘사했다. 그럼 공동체로 있으면 우리는 성화하는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공동체로 있으면 우리의 죄가 죽어지고 우리 안에 새사람이 소생하게 되는가? 실제로 공동체가 어떻게 기능하기에 우리는 공동체로 있으면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럼 성경에서 그런 공동체적 치유나 성장 같은 코드를 예시를 통해서 찾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의 예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갖는 통상적인 기대, 곧 행복하고 평안하고 만족스럽고 성장이 있고 변화와 감격이 있는 그런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사실 성경에서 이런 예시는 희귀하다. 굳이 애써 찾는다면 오순절 예루살렘 공동체, 가나안에 갓 들어온 이스라엘 공동체, 요시야의 개혁 공동체, 포로 귀환 후 느헤미야 공동체 정도를 억지로 끼워 맞춰서 예시로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경의 역사에서 이런 예시를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 걸까?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오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교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현대의 환경은 더 그렇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분주한 삶을 살며, 자연과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소외를 겪고 있다. 그렇다고 농어촌 지역이라고 해서 자본주의적인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면서 살기 쉽지 않다.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우리는 각박하고 분주하며,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교회가 되었든지 TV나 여가 문화가 되었든지 힐링과 자존감 같은 키워드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도시와 자본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접하기보다 부속처럼 대우하는 경향이 있고 역설적이게도 근대를 루터(Luther)의 개인주의로부터 열었다면, 근대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개인이 소외를 겪는 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소외는 인간을 소모하고 탕진하는 이 시대의 문화적 코드와 적지 않게 관련이 있고 그렇게 소모된 개인은 교회에서도 지난 반세기 동안 소모되는 존재로 치부되었다. 물론 귀한 헌신과 목회적인 돌봄이 있었음에도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성화와 관련 없는 소모되는 삶이 만연했고 그런 피로감에 젖은 교인들은 가나안 성도가 되었다. 가나안 성도가 되지 않았더라도 대형교회에서 자신을 숨긴 채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 교인들이 많아지면서 공동체로서 교회가 지녀야 할 형제 사랑은 점점 형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소모되고 소외된 인간은 교회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더 정직하자면 과연 교회 안의 교제가 교회 밖의 세속적 사람들의 교제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을까? 물론 원리적으로는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와 그 연합이 우리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형제 사랑의 원리라는 점은 진리이지만 우리 삶의 자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교회 성장의 열정을 보인 여성도들의 가정에서의 삶은 가정을 믿음으로 이끄는 놀라운 신앙의 저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남편들을 교회로부터 더 멀어지게도 했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과 적절한 소통을 이루는 데 실패한 모습이 한국 교회의 여성도들을 중심한 교회 성장의 한 단면이다.
그러면 교회 안의 소통과 교제에 적절한 정도의 밀도와 사랑의 나눔이 있을까? 주일 공예배 후,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다소간의 담소, 그리고 2-3시쯤 오후 예배를 드리고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서 소모되고 소외된 자기를 채우는 형태의 영적인 장터에서 자신이 지닌 정서적이며 영적인 허기를 허겁지겁 채우는 프로그램들로 채워진다. 다소 자기애적인 이 과정들은 자기만족을 추구할 뿐 공동체적 관계를 촉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상호관계를 촉진하는 시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시간들이 영적 필요에 대한 강의나 자기 계발과 성장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성경공부도 이런 형편에 놓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부분의 성경공부들이 복음과 회심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성경의 지식들의 나열이나 지적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교회 환경에 놓였다면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에서 이뤄지는 여러 행사들로 세상에서도 지치고 교회에서도 지친다. 특히나 청년들의 형편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들의 영적인 필요는 거의 공급되지 못한 채 장년들이 해야 할 일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소모적 시간들로 주일이 채워진다.
그러나 청년들의 실제적 필요는 사실상 참된 교제이며, 그 교제를 통해서 의미 있는 만남을 맺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장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 주간 세상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에 대한 대화, 그날의 날씨, 자녀 교육에 대한 정보, 심지어 경제와 정치 이야기,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 등등의 삶의 여러 정황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그들이 영적으로 어떤 형편에 처했는지 혹은 자신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를 나누는 대화는 거의 없다. 그나마 이런 내용의 대화들도 그 형식에 있어서 제대로 주고받지 못한다. 교회 생활 40년차 모태 신앙인 장년 성경 집사는 식사 시간에 마침 앞자리에 앉은 자기보다 2살이 어린 소망 형제에게 가볍게 오늘의 날씨로 말을 건넨다. 이야기는 곧 동네 부동산 가격으로 옮겨 가고 소망 형제는 자기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괜찮은 부동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곧이어 자신이 사는 집값이 떨어진 성경 집사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 성토한다. 자매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숙 집사는 자기 큰아들이 이번에 성적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얘기를 듣던 옆에 선희 집사는 어느 학원에 보내는지 정보를 묻는다. 학원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옆에서 듣던 찬숙 집사는 자기가 어디서 들은 그 학원 선생에 대한 어느 학생의 불만을 늘어놓으면서 그 학원 별로라는 말을 내놓는다. 무엇인가 대화는 오고 가는 거 같기는 하다. 사실 교회에서 이뤄지는 이런 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대화가 우리를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묶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일주일에 한 두 번 하는 이런 대화가 과연 우리의 관계를 우리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하신 말씀처럼 진리가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 줄 수 있을까? 그들의 교우 관계는 중고등학생의 우정보다 깊이가 없고 직장동료만큼의 책임도 없는 관계다. 그 관계적 피상성은 쉽게 교회를 옮기고 가나안 성도가 넘쳐나는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심지어 영적인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바벨탑 사건과 같은 불통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영적인 대화를 한참 나누던 석현 형제는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자신이 수고한 것에 비해 아내가 자신의 수고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함을 공동체에서 토로한다. 곁에 있던 몇몇 형제들의 지지에 대해 석현 형제는 “제 아내에게 그 말을 꼭 전해 주세요”라고 화답한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아내와 소통하고 싶은 열망과 그런 열망과 달리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마음이 그렇게 표현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성숙 권사님은 석현 형제에게 그의 아내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다. 얼마나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냐고 하는 이런 표현들은 상대가 드러낸 영적인 현실을 쉽게 덮어버리고 만다. 예컨대, 핵심감정 두려움의 사례 중 하나였던 유미 씨의 공포반응에 대해서 교회의 지체들이 그녀에게 했던 “믿음이 좋으니까”라는 말은 격려가 아니라 그녀의 증상을 키우는 반응이었다. 결국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름때가 묻은 옷의 기름때를 빼려면 기름기가 필요하듯이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일어나려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믿음과 긍정으로 옮겨 가면서 상대가 처한 현실을 덮어버리고 만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부부는 정서적인 별거를 경험하게 되고 성도는 교회에서 더 이상 영적 대화를 시도하지 않게 된다.
왜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대화를 기피하게 되었을까? 왜 부부가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을 기피하게 될까? 이런 대화는 갈등만 키울 뿐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생채기만 내었던 이전의 경험이 누적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제대로 다루는 기술이 없고 이것을 해결하는 게임의 법칙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스포츠든지 경기가 재미있으려면 선수들의 활동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상호간에 인정할 만한 게임의 법칙이 존재해야만 한다. 리시브는 하지 않고 서브만 하는 테니스 시합이 흥미가 있겠는가? 핵심감정은 공동체가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게임의 법칙과 같다. 힘든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루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신자가 자기 한계를 넘어서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자기를 이해하고 표현하고 수용하고 주님께 맡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런 이해의 지평이 타인을 이해하는 지평도 확장시키며 결국 관계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내적인 힘도 함께 키우게 된다. 핵심감정을 통해서 대화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주 고백하는 것 중 한 가지가 3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마치 2-30년 사귄 것 같은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 훈련을 마치게 되면 여러분은 잠언의 말씀처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잠 27:17)” 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러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납은 개인적인 기도와 성경 묵상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은 은혜의 방편이다. 이 말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라는 말이다. 가정에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은 아이는 아무 경험 없이 밥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보호와 지도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통해서 자라간다.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때부터 고백해 온 교회를 어머니라고 말하는 진짜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는 영적인 밥을 먹는 장이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영적 근력과 정서, 사회성이 발달하는 장이기도 해야 한다. 성화가 교회 공동체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동시에 이런 교회 공동체의 장이 병원 같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해진 무리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당연히 성경 전체에 나타나 보이는 사건 사고가 많은 교회 공동체의 어수선함은 오늘 우리 교회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교회는 쓰레기더미에서 핀 장미꽃 같은 것이다. 이 현장성을 떠나서는 진정한 의미의 성화를 기대할 수 없다.
2019.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