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역사학자. 파리8대학 과학사 교수를 역임했으며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010년 세상을 뜰 때까지 수학이나 과학사의 중요한 주제들을 소설의 힘을 빌려 흥미롭게 발전시켜 나가며 수학과 과학에 관련된 전문지식을 대중화하는 데 앞장서 왔다.
프랑스 3대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4년간 수학자 칼럼을 담당했으며, 『세계의 측량』으로 2000년 프랑스 한림원상을 수상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20개 언어로 번역된 『앵무새의 정리』는 프랑스 과학자협회 특별상을 받았다. 그 외 저서로는 『수의 세계』, 『베레니케의 머리카락』, 『항해일지』, 『제로』, 『자오선』 그리고 2007년에 발표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수학자의 낙원』 등이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표준 미터의 길이를 결정하기 위해, 1792년부터 1799년까지 피에르 메솅과 장 밥티스트 들랑브르는 프랑스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오선을 측정했다.”
나는 흥분에 떨기 시작했다. 1792년 여름이라면, 왕정이 종식된 때가 아닌가? 1799년 가을은 또 집정정치가 시작된 때가 아니던가? 혁명력 등등…….
그 두 시기의 사이라면…… 공화정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 새로운 척도의 단위를 정립하기 위해, 두 명의 천문학자가 공화정이 지속되는 동안 프랑스 영토의 전체 길이를 측량했던 것이다. 영토의 측량은 곧 역사의 측량이었다. 미터가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을 합법적으로 공포하는 법에서, 미터를 ‘공화주의의 척도’라고 명명했던 것을 누가 기억이나 할까?
이 세상에 하나의 척도를 탄생시키기 위해 역사와 지리가 결합했던 것이다!
도량형학에 관한 논문에서 뽑아낸 그 문장을 읽고 있을 때, 내가 탄 지하철 열차는 막 몽소와 바르베 사이, 파리의 지하 구간에서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은 순식간에 지상으로 올라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서둘렀다. 그러나 사전이나 백과사전은 나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다음 날 나는 떠났다. 파리에 있는 도서관들로 순례 여행을.
내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그 문장을 읽었을 때 가졌던 순진한 상상과 기대하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대뜸 나는 내가 그 이야기로 픽션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진정한 픽션!
나는 이미 여러 편의 영화들을 제작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우연이 나 스스로를 통합적이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미터의 서사시는 나에게 영화와 과학, 내가 가장 몰두했던 그 두 가지 활동을 한데 녹이도록 해주었고, 게다가 정치적인 의미에서 혁명이라는 멋진 선물까지 더해주었다. 이제 나의 달걀들은 모두 한 바구니에 담겼다. 과학, 예술 그리고 정치. 여기서 과연 어떤 오믈렛이 나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