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년에 출생해 1072년까지 66년을 살았다. 1007년부터 1030년까지는 관직 생활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보냈다. 그는 4세 때 부친을 잃고 모친과 함께 백부 구양엽(歐陽曄)이 추관(推官)으로 있는 수주(隨州)로 가서 생활하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려서부터 구양수는 한유(韓愈)의 깊고 예리한 문장에 매력을 느꼈고 그를 추앙했다. 1023년 17세 때 처음으로 수주의 지방 고시에 참가하지만 그의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그 뒤 1028년 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서언은 구양수의 웅대한 문장에 감탄해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해 겨울 서언과 함께 경사로 가서 춘계국자감고시(春季國子監考試)에 응시한 구양수는 수석의 영광을 얻었고, 가을에는 국학(國學)에 응시해 또 수석을 차지하게 된다.
1034년에는 아내와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었으나 1043년 인종(仁宗)은 언로(言路)를 확장하기 위해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지간원(知諫院)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수는 경사로 돌아온다. 1054년 수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며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한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수를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지속적으로 경사에 머무르며 ≪당서(唐書)≫ 편찬에 참여하게 되고 한림학사 겸 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하게 된다.
구양수는 66세의 나이로 천명을 다했고, 2년 후에 조정에서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충’은 그가 일생 동안 이루어낸 문학적 위업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