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고고학적 지식과 깊이 있는 현대적 사유를 담고 있는 《유령의 벽》은 그 풍성함에 기대어 읽을 수 있는 결 또한 다양한 작품이다. 먼저 열일곱 소녀 실비가 갖는 사회경제적 위치와 그에 수반되는 제한적 자유를 통해 젠더, 계급, 그리고 지역이 유발하는 격차와 불평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해체하는 연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유령의 벽’을 소설 속에서 재생시킴으로써 현재 세계 곳곳에서 도드라지고 있는 장벽에 대한 사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유령의 벽’은 로마시대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술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것인데,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에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항한 잉글랜드 북부 부족 중 한 부족이 벽을 세우고 선조들의 유해를 매달아 전시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현재 세계 곳곳에서 높아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유형무형의 벽들이 ‘유령의 벽’과 다르지 않으며, 이 벽들은 실제로 누군가를 막는 기능을 기술적으로 탁월하게 수행하기보다는 적대의 뜻을 전하는 신호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본다.
습지 미라는 간단히 설명하면 북유럽, 특히 덴마크, 독일,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네덜란드 등지의 습지에서 발견되는 썩지 않고 보존된 인간의 유해다. 이들을 왜 죽였는지에 대한 이유나 정황은 연구가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고, 현재로서는 당시 습지가 물도 아니고 땅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신성한 장소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기반하여 제의를 드리는 희생제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염두에 뒀던 제목은 ‘유령의 벽’이 아닌 ‘희생양’이었다는 작가의 말을 생각한다면, 철기시대의 희생양이었던 ‘습지 미라’를 현대적으로,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재구성하여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습지 미라, 죽었으나 죽지 않은 채로 이천 년을 산 그들. 폭력의 주체가 밀어넣은 세계에서 살아 돌아올 수도 없고 그 너머의 길을 갈 수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이천 년을 보낸 그들은 《유령의 벽》을 통해 아버지의 폭력, 여성에 대한 차별, 그리고 계급적 편견 아래 놓여 극복의 길을 찾지 못하고 새로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실비, 더 나아가 이 시대의 희생자들과 조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