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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일본의 극작가, 연출가,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본 연극계에서는 일본 근대극(新劇)의 창시자, 근대 희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와카야마현 사무라이 계급 후손이었던 부친 뜻에 따라 1904년 15세 나이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07년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장자크 루소, 샤토브리앙 등 프랑스 문학에 흥미를 느낌과 동시에 군대 생활에 대한 염증과 반발로 탈영을 시도하거나 일부러 시험에 백지를 내기도 한다.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지만 1914년 독일전쟁 사단 동원령을 계기로 군대 생활에 더더욱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휴직계를 제출하고 도쿄로 상경해 1917년 28세에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1919년 8월, 프랑스 연극에 관심을 갖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파리 주재 일본대사관, 국제연맹사무국에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프랑스 연극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소르본대학 르퐁 교수 소개로 자크 코포를 만나 그가 대표로 있는 뷔에콜롱비에 소극장에서 연극을 배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급히 귀국한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썼던 〈노란 얼굴의 미소〉를 고쳐 1924년 〈낡은 장난감〉이라는 제목으로 《엔게키신쵸(演劇新潮)》지 3월호에 발표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유럽 알프스산맥 동부 지역 티롤의 어느 호텔에서 만난 일본인과 국적 불명 외국인의 격정적 사랑 이야기인 〈티롤의 가을〉, 1925년에는 일요일 오후 신혼부부의 일상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극 〈종이풍선〉 등을 발표하면서 말의 뉘앙스를 중시했던 프랑스풍 심리극의 독특한 분위기로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새로운 조류를 몰고 온 신진 극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29년 오사나이 가오루가 죽자 그가 이끌던 일본 근대 연극의 산실 축지 소극장이 해산된다. 이때부터 기시다 구니오는 일본 근대극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다. 《비극희극》, 《극작》 등의 연극 잡지를 펴내며 다나카 센카오(田中千禾夫), 고야마 유지(小山祐士), 모리모토 가오루(森本薰) 등 수많은 극작가를 소개하고 배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군부에 전선에서 공연하는 이동형 연극단을 제안, 위원회를 만들고 문화부장에 취임해 1942년까지 이동극단을 이끈다. 그것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라는 우익 단체다. 1950년 기시다 구니오는 문단과 연극계를 연결, 일체화해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 내려는 문학입체화 운동을 주창하며 ‘구름의 회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1954년 3월 4일,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연출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도쿄의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음 날 아침 향년 63세로 사망한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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