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소르본 대학에서 의학과 문학을 전공한 그는 앙드레 바쟁의 지휘하에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활동을 하다가 아내가 물려받은 유산으로 1959년 첫 장편영화 <미남 세르주 Le Beau Serge>를 찍었는데 데뷔작부터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비범한 재능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프랑스 영화계에 선풍을 일으키며 '누벨바그'라는 말을 유행시키기 전에 만들어진 '누벨 바그' 영화의 예고편과도 같은 영화로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고 감독의 상상 력에 따라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얼마나 독창적으로 찍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그는 에릭 로메르와 공저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누명 쓴 사나이>(1956)를 분석한 연구서 <히치콕> 을 집필했을 만큼 ‘히치콕주의자’로 유명했다. 그렇다고 샤브롤이 히치콕의 영화를 단순 모방한 것은 아니다. 누벨바그에 대해서도 “뉴웨이브(Nouvelle Vague)는 없다. 영화의 바다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창조한 감독이었다. 히치콕이 그랬듯 살인의 이면에 감춰진 죄의식과 강박증 같은 인간의 말라비틀어진 감정에 주목하되 프랑스적이라고 해도 좋을 배경과 감성을 섞어 샤브롤만의 미스터리 스릴러 문법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도살자 Le Boucher>, <부정한 여인> 등 중상류층 가정을 배경으로 부르주아 세계를 파헤치는 정교한 스릴러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그는 1960년대 후반에 집중된 작품을 통해 전성기를 열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프랑스 상류층과 중산층을 오가며 그들 세계 속에 팽배한 관계의 긴장과 폭발을 다뤘다는 점에서 특히 열렬한 추종자를 불러 모았다.
이후에도 샤브롤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1970년대 잠시 흥행성적의 저조로 슬럼프를 겪었다. TV영화와 광고 연출까지 찍는 지경에 이르게 됐지만 <비오레트 노지에르>(1978)를 통해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며 이 영화를 통해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널리 알렸다. 그는 1970년대말부터 제작자 마랭 카미츠와 주제 의식과 감각이 날카로운 여러 스릴러 영화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범죄 영화 '형사 라바르뎅'과 '식초에 절인 닭' 등 좀 더 가벼운 작품들도 선보여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유작 <벨라미>(2009)까지 안정적인 영화 경력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