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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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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사건들의 예지>

이찬

197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비평집 [헤르메스의 문장들] [시/몸의 향연] [감응의 빛살] [사건들의 예지], 문화비평집 [신성한 잉여]를 썼다.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했다.
2022년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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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감응의 빛살> - 2021년 10월  더보기

책머리에 이번 비평집의 이름을 ‘감응의 빛살’로 정했다. 그것은 여러 차례 곤혹에 가까운 상황을 불러들였다. 맨 앞자리에 내걸린 「1960년 4월 3일: 혁명적 감응과 군중적 감염력」 때문이었다. 여기서 시도된 ‘감응’ ‘감염력’이란 말은 들뢰즈・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사용한 ‘affect/affect’와 더불어 ‘les affects intensifs/the intensive affects’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나,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스피노자의 라틴어 ‘affectus’에서 기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 글을 처음 발표한 지면(<계간 파란>, 2018.가을)에선 “여기서의 그림자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거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될 혁명적 정서의 공감대, 또는 집단적 공명의 파급력을 은유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그림자는 또한 얼마 전 문학을 위시한 한국 인문학 전체의 수준을 차원 높은 ‘담론/번역’ 논쟁의 바다로 이끌어 간 정동(affect) 또는 감염력(les affects intensifs)에 대한 미학적 직관과 예술적 형상화의 방법론을 선취한 탁월한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라고 기술한 바 있었다. 그 당시 마음결을 휘어잡고 있었던 것은 ‘affectus’의 번역어로 ‘정동’을 활용해 온 역사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에 이르렀으며, 이른바 지식-출판업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번역어 역시 ‘정동’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를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단이었으리라. 그러나 2019년 6월부터 올 7월까지 참여한 <주역> 공부는 이를 돌려세웠다. 특히 2019년 12월 21일 만난 택산함(澤山咸) 괘는 스피노자의 ‘affectus’에 상응하는 동아시아 고전 텍스트의 용어가 바로 ‘감응(感應)’일 수 있으리라는 새로운 물음과 착상을 불러일으켰다. 이 비평집은 ‘affectus’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뿐더러, 그것과 호환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는 한국어 어휘로 ‘감응(感應)’이란 말을 활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선 장구한 시간 동안 우리 전통과 더불어 동아시아 문명사 전체에 뿌리박힌 용어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특정한 마음 상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더 나아가 ‘천지만물(天地萬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침투의 무한성과 그 영향력의 그물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식 번역 어투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정동(情動)’이나, 한 개인의 고유하고 순간적인 마음결의 정취라는 어감을 감싸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感情)’ 또는 ‘정서(情緖)’에 비해, 훨씬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신체적・내면적・물리적 영향 관계를 빠짐없이 수용할 수 있는 말로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의 일상 공간에서도 큰 무리 없이 사용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만드는, 어떤 확신에 가까운 마음 상태로 이끄는 것이 틀림없기에. 이와 같은 ‘감응’이란 말에 대해서는, 물론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를 관류했던 ‘ressemblances(유사성)’의 에피스테메를 구성하는 네 가지 ‘주요 형상들(les principales figures)’로 언급한 ‘convenientia(부합)’ ‘aemulatio(경합)’ ‘analogie(유비)’ ‘sympathie(감응)’ 같은 것들 가운데서도, ‘sympathie’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감응의 작용에서는 어떤 경로도 사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거리도 전제되어 있지 않다. 감응은 세계의 심층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작용한다. 감응은 한순간에 가장 드넓은 공간을 가로지른다.”라는 문장들이나, “감응의 힘은 매우 커서 단지 접촉만으로 솟아나거나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세계 내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초래하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들이라도 가까이 접근시킨다.” 같은 표현을 꼼꼼한 시선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니, 푸코의 저 문장들을 <주역> 택산함(澤山咸) 괘의 대상전(大象傳)에서 등장하는 “柔上而剛下하여 二氣感應而相與하여 止而說하고 男下女라.(柔가 위에 있고 剛이 아래에 있어서 두 기운이 感應하여 서로 친해서 그치고 기뻐하며 남자가 여자에게 낮춘다.)” 같은 구절이나, 저 괘에 대한 정이천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觀天地交感化生萬物之理와 與聖人感人心致和平之道면 則天地萬物之情을 可見矣라. 感通之理는 知道者黙而觀之可也니라.(天地가 서로 감동하여 만물을 化生하는 이치와 聖人이 人心을 감동시켜 和平을 이루는 道를 보면 天地 萬物의 情을 볼 수 있다. 感通의 이치는 道를 아는 자가 묵묵히 관찰하여야 한다.)” 같은 구절들과 다시 상세하게 비교・검토해 보라. 푸코가 제시한 ‘sympathie’와 <주역>의 인용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感應’이나 ‘感通’이 상호 호환 가능한 번역어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직감할 수 있을 듯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시 「Correspondances(만물조응)」에 나타난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은/간혹 혼돈스러운 말을 흘려보내니,/인간은 정다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상징의 숲을 건너 거길 지나간다.//밤처럼 날빛처럼 광막한,/어둡고 그윽한 통합 속에/멀리서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향과 색과 음이 서로 화답한다.” 같은 이미지들을 다시 섬세한 손길로 매만져 보라. 여기서 나타난 표제어 “Correspondances”나 이미지들의 짜임새 역시, <주역>의 무수한 주석들에서 빈번하게 활용된 ‘感應’ 또는 ‘感通’에 부합하는 의미 구조와 뉘앙스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향과 색과 음이 서로 화답한다”라는 이미지가 탁월한 감각의 향연으로 흩뿌려 놓는 것처럼, 보들레르의 「Correspondances」와 <주역>의 ‘感應’이나 ‘感通’이 그 배경에 포괄하고 있는 ‘天地萬物’이나 ‘和平’이라는 뜻과 뉘앙스는 거의 같은 맥락을 이룬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실상 <주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문화 전통에서 오랫동안 활용되어 온 ‘감응’이나 ‘감통’은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감각이나 엄청난 시공간적 격차로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화합하고 공명한다는 의미의 벡터를 표현하기 위한 말로 사용되어 온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응’이란 말이 근대과학 발생 이전의 세계를 수미일관하게 관류했던 유사성(ressemblances)의 인식소, 또는 아날로지(analogie)의 감각과 세계관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개체들이 상호 영향력을 주고받는 그 관계의 그물을 지시하는 용어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측면을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가령 ‘물리적 감응/심리적 감응’이나 ‘내면적 감응/정서적 감응’, 그리고 ‘신체 감응/원격 감응’ 등과 같은 용어들은 모두 무리 없이 사용 가능한 것일뿐더러, 이미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생활세계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감응’은 그것과 인접한 다른 말들과 결속되어 그야말로 다채로운 쓰임새로 그 외연이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한 ‘감응’은 “두운처럼 하나의 계열임을 표시해주는 말(감[感])로 일련의 다른 단어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뿐더러, “감정뿐 아니라, 감흥, 감동 같은 말들, 그리고 감수/감수성, 감각, 감화, 감염 같은 개념”을 사용하는 맥락에서도 일관된 관점과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감응의 빛살’이란 명명에서 흔히 활용되지 않는 ‘빛살’에 깊은 애착을 가졌던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빛’과 ‘살’이 결속된 저 말에서, ‘빛’이 가시적이고 지각 가능한 어떤 물리적・정서적 자극과 효과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살’은 보이지 않는 형세와 분위기, 좀처럼 지각되지 않거나 지각 불가능한 미시적 차원의 물리적・정서적 자극과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감응의 빛살’이란 시와 문학과 예술 텍스트를 매개로 감응하는 자와 감응되는 자가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는, 그 사이 공간에서 움터 오르는 양자의 상호 침투와 상호 변용의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벤야민의 ‘아우라’ 또는 메를로-퐁티의 ‘살’로 집약될 수 있을, ‘영기(靈氣)/분위기(雰圍氣)’를 현란하게 엇갈리면서 움터 오르는 휘황한 교감의 순간이자 화합의 황홀경을 표현하는 말일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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