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어느 날, 한숨도 못 잔 새벽 6시쯤으로 기억한다.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두 개의 소재,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고대 히브리어나 중세 영어만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는 스스로를 희생해서 타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를 하나로 묶으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문득 궁금해졌다. 곧장 노트북을 켜고 두어 시간 플롯을 짰다.
동네 영화관에 가서 ‘구마驅魔’에 관한 영화를 봤고, ‘당기시오(Pull)’가 적힌 문을 자꾸 미는 바람에 복도에서 한참 서 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는 바람은 매서웠고, 붉어진 뺨을 다독이며 뒤늦게 잠을 청했다. 여름의 나라로 떠나는 일이 어렵지 않았던 건 그 겨울들이 끔찍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여름만 있는 곳에서 나는 그만 쓰고 싶었다. 소설로 맺은 인연과 안녕을 고하고 싶었다. 낯선 언어만을 하게 된 이의 서사를 상상한 것은, 실은 내가 그랬으면 해서였다. 외부 요인에 의해 쓰고자 하는 욕망이 꺾이길,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길 바랐다. 스스로 그만둘 용기는 없었다. 소멸된 언어만 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도 쓸 인간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나를 갉아먹으면서 쓰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소설 쓰는 지영보다 생을 꾸려 가는 지영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결심했다.
여름의 여름이 시작될 무렵 팬데믹의 시대를 맞이했다. 정보는 충분치 않았고, 그마저도 낯선 언어로 찾아왔다. 이국에서 마주한 공포 앞에서 나는 나를 지켜 주는 게 무엇인지 질문했다.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으나, 대신 잊고 있던 이가 떠올랐다. 고립의 시간 동안 300장 분량의 중편이 장편으로 확장됐다. 그 후로도 종종 들여다봤지만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 소설을 마주하는
일이 왜 이리 괴로운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먼지 인간들은 다름 아닌 나였다. 조각나고 부유하고, 그러다 사라지는 이들에게 나의 어떤 순간이 스며 있었고, 나는 한때의 나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제야 소설이 다가왔다.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저의를 모르겠는 그의 행동과 말이 많다. 쓰면서도 왜 이렇게 생각하나, 왜 이런 선택을 하나 질문하게 된다. 나는 내 소설 속 인물들을 잘 모르겠다. 그것만이 아니다. 출입구가 막힌 공항에서 철조망 너머로 아기를 넘기는 부모, 그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는 군인, 세 손가락을 들고 총구 앞에 서는 이, 지진과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제 손으로 가족의 시신을 찾는 이, 그 마음들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그것만 모르겠는가. 예심에 올랐다는 소식에 함께 애태운 피붙이의 마음을, 내가 쏟아내는 불안을 나눠 가져간 친구의 마음을, 당선과 출간 소식에 말을 잇지 못한 부모의 마음을 나는 모른다. 선율은 열 밤이 지나면 상어 영화를 보기로 하고선 800일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이모를 기다렸다. 건과 영상 통화를 할 때면 나는 작은 고모야,라고 말하지만 실상 만난 적 없는,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다. 나를 향한 아이들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새벽의 호숫가를 걷겠다며 이른 잠을 청하는 나를, 희로애락 앞에서 지금의 감정을 문장으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아는 게 없다. 비겁하지만 그렇다.
스스로 믿지 못하는 순간에도 믿어 준 이들이 있다. 때때로 가장 날카로운 칼을 내민 것도 그들이었으나 그 또한 쓰게 한 힘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침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족들, 고맙다. 먼 데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나를 들여다본 친구들 역시 고마운 이들이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지는 수다, 하늘을 날아 찾아온 책과 편지가 있어 마음은 가난할 새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김미현 선생님, 이은정 선생님, 강영숙 선생님, 문학을 꿈꾸고 소설을 욕망하게 한 분들. 선생님들을 떠올리면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어둑한 길임에도, 결국 가야 할 곳을 향해. 계속 빛이 되어 주실 거라, 오랫동안 건강하게 곁에 머물러 주실 거라 믿는다.
“이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선율이 물었다. 나는 답했다. “소설 쓰는 사람.”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써 왔고 계속 쓰겠습니다,라고. 여전히 나 따위가 뭐라고 쓰나 싶다. 그럴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고 믿는 지영이 소설 따위가 뭐라고 그러느냐 말한다. 주저앉은 지영 옆에는 오늘의 조각이 소설 속 한 단락이 될 테니 괜찮다고 속삭이는 지영이 있다.
계속 망해도 된다는, 더 실패해 보자는 비항구적인 확신인 이 상을 손에 들고 어마어마하며 별거 아닌 소설과 함께 걸어가겠다. 그 길에 끔찍한 계절 같은 건 없길.
그러니 감사의 말은 결국 단출한 문장만 필요하고 이 글 역시 실패했다.
감사합니다. 계속 쓰겠습니다.
2021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