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함경북도 출생으로 회령보통학교,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태극기 사건으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북간도로 가서 명동중학에 들어가 나운규를 만났다. 1927년 나운규의 영화 <들쥐>에 연기자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잘있거라>(1927), <금붕어>(1927), <옥녀>(1928), <사나이>(1929), <벙어리 삼룡>(1929) 등 나운규의 영화에 계속 출연함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30년에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구영 감독의 <승방비곡>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였다.
연기자로서 활약하는 한편으로 그는 1930년 <도적놈>을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큰 무덤>(1931), <도생록>(1938), <신개지>(1942) 등 민족주의자로서의 자유사상이 투영된 작품을 감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제의 어용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낙향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계몽영화사를 설립하고 다시 영화 활동을 시작하여 1945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에 20여 편에 가까운 영화를 연출하였다.
8·15광복 직후부터 1940년대 후반에 걸쳐서는 <윤봉길 의사>(1947), <유관순>(1948) 등 독립 운동을 소재로 한 이른바 ‘광복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1950년 이후 1960년대에는 <논개>(1956), <한말풍운>(1959), <황진이의 일생>(1961) 등 민족의식을 담은 사극과 <고향의 노래>(1954), <영원한 내 사랑>(1958) 등 오늘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많이 연출하였다. 1963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 연합회 이사를 거쳐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