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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서락미 (徐樂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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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대만영화 백년사>

서락미(徐樂眉)

국립 대만 예술대학 학사
북경 중앙희극학원 감독 석사
북경 중국예술연구원 영화학 박사
주요 저서 | 『遠足』(2009, 2014 개정판), 『迷路』(2013), 『恕念』(2015)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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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대만영화 백년사> - 2022년 4월  더보기

천리귀안千里歸雁 4백 년 전의 대만은 정치·경제 중심이었던 대남(台南)에서 대북(台北)으로 이동하고, 그 외 지역은 장려(瘴疠) 지역이었다. 이 시기 고난의 역사기록은 남아있기는 하지만, 거의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1860년쯤에, 대만은 어쩔 수 없이 무역 거래를 개항하며, 근대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안타깝게도 중원문화(中原文化)는 식민지 시기 때마다 다른 문화가 유입되며 단절된다. 하지만 중국의 원류인 염황염제(炎帝)와 황제(黃帝)에서 유래한 완고한 민족 유전자는 문화전통을 최대한 고수하고 계승하려는 버팀목이다. 예컨대, 국민당 정부에서부터 현대의 민주사회까지 교육의 변화를 살펴보면, 대만은 정통 근원의 계승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를 인정하는 심리를 강화하는데 방점을 두고 있다. 선거 때마다 민족의 의제는 늘 집단을 분열하는 수단이 되며, 실제로 대만 민중은 이미 악순환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과 같이, 대만은 “말은 옛 모습 그대로 달리던 대로 달리고, 춤은 예전에 추던 모습 그대로 추고, 밥은 이전에 먹던 그대로 먹는” 사회 현상이 형성된다. 이처럼 대만 민중은 정치적 혼돈과 자유민주주의의 틈바구니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부계 혈연은 중원에서 시작되었지만, 원주민 및 청나라 시기에 이민 온 한족이 아닌 대만사람들은 (약간의 농락과 적의를 내포한 의미로) 외성인(外省人)이라 불린다. 따라서 내성인/외성인 간의 갈등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중국과 대만 양안 간의 긴장된 열기는 또 한 번 우리 세대의 기대를 저버린다. 이러한 격변의 흐름 속에서, 대만 민중은 항상 바둑알처럼 조종을 당하면서 반항할 힘조차도 없다. 다행히도 황금시대의 대만영화는 희극영화, 무술영화, 사랑 문예 영화, 황매조(黄梅調) 영화, 가무영화, 액션영화, 지역영화, 군대영화 등을 통해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기의 아련한 기억을 회상시킨다. 당시의 대만은 사회 관습뿐만 아니라 오락 분야가 매우 단순해서, 영화 아니면 TV이었다. 따라서 한정된 환경 속에서, 화려한 대만영화의 역사가 탄생한다.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노래 혹은 뛰어난 가수 및 배우는 전 세계 중국인의 뇌리에 각인되며, 영화의 유산은 중화 문화의 뿌리와 영혼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듯이, 경제 기적을 일으켰던 아시아 ‘네 마리의 용’중의 하나인 대만의 후광은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흔들리고, 그 빛을 점차 잃고 만다. 게다가 2,000년의 정국 변화로 국민당은 세력을 잃게 되고, 정국 변화에 따라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은 재산을 팔아 대륙으로 향한다. 예컨대, 중국과 대만의 양안이 대치 상태로 놓이지만 대륙이 적절한 시기에 연결고리 역할을 하자, 영민(榮民)은 점점 대륙으로 몰려간다. 이후 생업과 관련된 여러 업종이 옮겨가기 시작한다. 가까운 해협을 건너, 드넓은 대지는 최적의 선택지이다. 문자와 인종이 같은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기를 찾게 해주며,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 갈등 해소와 융합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중국의 급속한 발전 추세에 따라 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주하게 되며, 전 세계의 트러스트(trust) 기업도 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대만영화 〈불능몰유니〉(不能沒有你)는 2009년 제46회 금마장(金馬獎, Golden Horse Awards)에서 최우수 영화, 최우수 감독, 최우수 대본, 그해 최고의 대만영화, 관객이 투표한 최고 영화상 등 5개 부문을 휩쓸며, 2010년 오스카 최우수 외국어 영화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한다. 대만영화가 몰락한 지 20년이 다 돼가는 즈음에, 이 영화의 흥행은 오랫동안 침묵했던 존엄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한동안 자랑스러운 사건이 된다. 20년 전에, 〈비정성시〉(悲情城市, 1989)로 베네치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후효현(侯孝賢) 감독은 “강산도 10년이면 변하는데, 자국 영화는 20년째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고, 왜 나아지지 않는지 참으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안(李安), 후효현(侯孝賢), 관금봉(關錦鵬), 두기봉(杜琪峰) 4명의 감독이 연달아 영화상을 받는다. 계승의 의미가 매우 깊고, 보릿고개 같은 대만영화에 강심제를 놓아준 셈이다. 100년의 대만영화가 몰락한 것은 특정 원인이라고 탓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산업의 쇠퇴라고 할 수 있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엔터테인먼트의 트렌드가 변화하였고, 열악한 영화 제작 환경, 부족한 제작비, 인재 유실,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방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 등이 원인이다. 산업이 정점에 도달한 후에 추락할 때는 숨겨진 모든 걱정과 허점이 태양 아래에 고스란히 펼쳐져 그 형체를 감출 수가 없다. 그 당시 영화제작자들은 겨우겨우 버티거나 포기한 상태이다. 공백기에는 머리 숫자만 채우고, 악순환의 영화 생태계가 반복되며, 거대한 파도가 위세를 떨치듯이 손을 쓸 틈이 없었다. 1990년대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대만영화산업은 지금까지도 원기회복 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은 급랭한 정국 변화에 따른 비판이나 공격을 겪은 후에 여전히 낮은 포복 상태로 전진하고 있다. 쇠퇴한 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긴축 생활을 하지만, 낙천적인 천성에 따라 여전히 즐겁게 살고 있다. 그러나 대만영화산업의 미래는 여전히 숨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금마장 영화제는 여전히 매년 개최된다. 개최장소가 북 대만에서 중부 및 남부 대만으로 옮겨지며, 금마장 영화제는 남부와 북부의 균형을 잡아 대만 전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로 성장한다. 출품 영화의 범위도 중국 및 홍콩, 대만으로 확대되지만, 대만영화의 수는 점점 감소하고 상을 받는 일도 점차 줄어든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대만영화제작자들은 여전히 소수의 질 높은 영화를 만들어, 세계 영화계가 가끔 대만영화에 주목하게끔 한다. 대만영화산업이 당면한 일은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 정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늘 자신의 입장을 고수해왔던 영화제작자와 감독 및 종사자들은 끼니를 잇지 못할 때도 이를 악물고 이겨냈는데, 지금 와서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은 꿈과 고집으로 대만영화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홍콩 그리고 대만에 없어서는 안 될 영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 및 경제의 안정은 국가 문화의 번영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정권을 잡은 정치가들은 문화 이데올로기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예법과 음악을 성행시켰고, 송 휘종(宋 徽宗) 조길(赵佶)은 시사(詩詞)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등휘(李登輝)의 친일은 대만 문화와 일본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중국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에 힘썼다. 진수편(陳水扁)은 객가(客家) 민족과 대만 소수민족을 중요히 여기고, 소수민족을 위한 객가 방송국 및 소수민족 방송국 등을 개설하는 대책을 세웠다. 겉으로는 민의에 순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효과를 촉진시키기 위함이다. 배후의 동기가 어쨌든, 일부 집단은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되며, 사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소외 계층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오래되고 광범위한 중화문화는 곳곳에 수천 년의 흔적이 담겨있으며, 옛것에 대한 그리운 마음은 수없이 많은 산과 물을 마주하고 있는 탄식의 소리이다. 섬사람들은 산의 웅장함 그리고 강과 바다의 사나움을 느끼지 못한다. 약 14억 인구의 중국에 비해, 대만은 2,300만 인구일 뿐이다. 물론 적은 숫자이지만, 작은 면적에서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하며, 눈부신 경제 기적을 이루었다. 중국과 대만의 무역, 우편물, 해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이미 대만 기업인들은 중국에서 상당한 시장 경제 성과를 창출하고 있었다. 가세가 기운 대만영화산업이지만, 영화인 간의 상호교류를 통해 여전히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으며, 중국과 대만의 영화는 더욱 가까워졌다. 대만의 영화 경험이 중국으로 전수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예컨대, 2009년에 〈자릉〉(刺陵, The Treasure Hunter), 〈운수요〉(雲水謠, The Knot), 〈풍성〉(風聲, The Message), 2010년에 〈대소강호〉(大笑江湖, Just Call Me Nobody), 2011년에 〈면인자〉(麵引子, Four hands), 2012년에 〈애〉(愛, Love), 2013년에 〈역광비상〉(逆光飛翔, Touch of the Light), 2014년에 〈등일개인가배〉(等一個人咖啡, Cafe·Waiting ·Love), 2015년에 〈대희림문〉(大喜臨門, The Wonderful Wedding), 〈풍중가족〉(風中家族, Where The Wind Settles), 〈자객섭은낭〉(刺客聶隐娘, The Assassin) 등의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이전의 번영과 박탈감을 모두 경험한 새로운 세대의 대만영화는 우수한 인적 자원이 등장하지만, 현재 전통과 혁신 간의 교차로에 놓여있다. 섬사람들은 중국 명나라, 네덜란드, 스페인, 중국 청나라, 일본, 국민당의 통치를 겪은, 즉 수백 년 동안 인고의 세월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낙관적이고 만족할 줄 아는 천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문화와 융합해 뛰어난 문화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20세기 영화선구자들의 노력 덕분에 대만영화가 활력을 찾게 되고, 유럽과 미국은 대만영화인들의 뛰어난 창의적 사고를 주목하게 된다. 상전벽해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심연에서 빠져나온 정부는 문화 및 창조 산업을 촉진하기 위해 재정을 투입한다. 〈해각칠호〉(海角七號, Cape No.7, 2008)를 필두로 이후의 영화들은 바람과 파도의 기세를 등에 업고 ‘후신영화(後新电影)’라고, 예컨대 ‘대만영화 문예 부흥 시기’로 불린다. 이러한 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독창성 또는 비전통적인 영화 스타일과 영화 언어를 통해 현재 대만 사람들의 숨소리를 반영한다. 세대가 바뀌는 발자국은 각 시기별 영화에 서로 다른 감정을 부여한다. ‘신영화(新電影)’, ‘신신영화(新新電影)’이후, 대만영화는 거리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아낸다. 모든 영화는 허공에 대고 대화하거나 공덕을 노래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본토 문화의 공명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민주주의와 혼란스러운 정치 사이에서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은 다양한 국가의 문화가 유입되지만 전통을 보존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영화가 역사,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구세대의 대만영화는 약간의 외침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신세대의 대만영화는 어떤 문화적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을까? 따라서 필자는 중원문화 및 타문화가 대만영화에 끼친 영향을 고찰해보며,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아 특유의 문화적 창의성으로 중국영화시장에 도전하는 대만영화를 논의하고자 한다. 또한, 현재 핫이슈인 「중국과 대만의 경제 협력 기본 협정(ECFA)」을 지렛대 삼아, 대만영화가 중국과 대만 간에 어떤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해보자. 10여 년 전, 우리 세대는 대만을 떠나 중국으로 공부하러 갔다. 그리고 10년 후, 대만의 인문 및 영화산업을 자세히 살펴보고 탐구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깨달음이 생겼다. 오랫동안 떠나 있을수록 감정은 더욱 깊어진다. 자그마한 대만이지만 거인의 울부짖는 외침처럼 소리를 지르자.

-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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