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영화 시나리오는 3막 구조가 가장 많이 쓰인다. 이야기 전체를 3막으로 나누는 방식인데 도입부인 1막과 마무리를 짓는 3막은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2막에 비해 짧다. 1막이 길어질수록 관객은 지루함을 느낀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3막으로 나누어 본다. 그중 1막이 참 길다. 영화 시나리오였다면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을까?
무려 20대 후반까지가 나의 1막이다. 그리고 2막, 30대부터의 나의 인생은 맥락도 없이 급격히 바뀌었다. 2막이 시작되는 내 인생의 주요 사건이라 하면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2막의 주요 공간은 부천이었다. 그렇다. 다른 인생이 전개된 배경은 부천이었다. 그러니까 부천이 내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늘 꿈꾸는 몽상가이자 자유인을 꿈꾸던 내가 사업을 시작하고,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협회의 회장을 맡아 업계를 대변해 목소리를 내고, 국가 지식 재산위원회에서 우리 콘텐츠 IP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이후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부천에 있는 경기디지털콘텐츠진흥원의 제안이 있어 가능했다.
부천과의 인연은 20대 후반 대학 강의를 시작한 후 30대에 접어들어 경기디지털콘텐츠진흥원 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 겸임교수로 출강하면서였다. 내가 맡은 것은 애니메이션 기획과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강의였다. 문화예술의 도시 부천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온 수강생들은 열정적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유독 반짝였고 반짝이는 것 앞에서는 누구나 빛이 나듯 그들 덕분에 나 역시 신나게 강의할 수 있었다. 건물 맨 위층 기숙사가 있어 공부와 숙식을 그곳에서 해결하던 아이들과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서로의 상상력을 북돋우던 아름다운 시간. 다만 아름다움은 불행과 함께 공존한다. 당시 나는 생의 처음 커다란 도전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 시간, 부천에서의 시간만큼은 안온했다.
“이곳 부천의 사옥에서 작은 공간 지원이 가능한데 애니메이션 제작을 해보지 않겠어요?”
어느 날 경기 디지털콘텐츠진흥원 관계자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천이라 다행이다, 였다. 2007년이었다. 만화산업의 중심 도시로 자리를 잡은 부천에서 공간을 내어준다니 생각지 못한 기회였다. 사업을 시작하는 데 있어 공간을 제공받는 건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으니까. 대학 강의와 다르게 자유롭고, 긴 시간 학생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수다를 이어가던 아카데미의 시간은 참 재밌었고 감사한 날들이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손 내밀어 준 부천의 따뜻함에 울컥했다. 개인사로 많이 지쳐서 작은 일에도 잘 울던 시절. 기회의 말은 위로였다.
그럼에도 쉽게 답을 할 순 없었다. 정중하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며칠 고민에 빠졌다. 내가? 나 유정주가? 사업을? 사업을 한다는 건 내 인생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20대의 나라면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곧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몸도 약하고, 셈도 글도 더뎠던 나에게 사업은 꿈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꿈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즈음, 정확히 서른 살에 아버지의 사업이 잘못됐고 언니와 함께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 누구도 그러라 하지 않았지만 ‘이제 너도 어른이 되어야 해’라는 내 마음의 소리. 사업을 할 기회는 바로 거절할 수 없는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다.
신뢰하는 어른들과 상의하고, 스스로에게도 여러 번 물으며 몇 날 며칠 깊은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제작사 <꽃다지>의 대표가 됐다. 짧은 문장으로 나열하니 그 시절의 내적 충돌과 고민이 굉장히 간단해 보이지만, 대표가 되는 건 녹록치 않은 과정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 속에 녹아들어 갈 테니 우선은 이 정도로 정리하려 한다.
사업의 길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활달해 보이지만 실상 지독히도 수줍음 많은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의견을 피력하고 일을 성사시키기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회사를 차리고 3년간 고군분투하며 온갖 지원 사업과 투자자들의 문을 두드렸다. 그 어느 곳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마치 저주에 걸려 절대 열리지 않기로 한 마법의 문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했다. 나에게는 그런 면이 있다. 허약하고 허술해 보여도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집요함이 있다. 이런 성정이 정치를 계속하게 하는 힘이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집요하게 두드린 끝에 마침내 저주에 걸려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다. 애니메이션계의 넷플릭스라고 할 수 있는 EBS에 편성을 받은 것이었다. 1980년대에 아버지의 프로덕션에서 만든 이두호 작가 원작 <머털도사> 애니메이션 뉴 버전, 2012년 「신 머털도사」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공부를 하다가 가르치다가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 산업에 발을 들였고,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이론을 가르치던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돌아보면 나의 인생은 부천에서 손 내밀어 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또래들 중에 가장 작고 순하고 역시나 맥락 없이 활발하기만 했던 유년의 성정이 그대로 남아 있던 서른 이전의 나와 여전히 작지만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는 나.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된 지금의 나 말이다.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유정주라는 인간으로 귀결되는 이 두 버전의 내가 어떻게 연결되고 포개지며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다. 대단한 엘리트도 아니고 엄청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닌 인생이다. 그러나 누구나 거쳐왔을, 누구나 지나갈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전하고 좌절하며 마침내 성큼 나아가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