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스트’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번뜩이는 순간을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사람들. 그들은 진리에 의해 구성된 거대서사 속에 엉뚱한 어휘들을 적극적으로 끼워 넣는다. 아이러니스트의 이야기들로 세상의 거짓과 부조리가 단숨에 무너질 수는 없지만, 그들이 잠깐 재밌게 놀다 떠난 자리에는 ‘우연성’이 남는다. 어른들에게 배웠던 많은 것들이 나와 상관없는 무언가가 되는 텅 빈 공간. 거기에 나는 아이러니스트처럼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게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런 아이러니스트였고, 극장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연성의 공간이었다. 중년이 되기 전까지 나는 그들의 노력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감사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쿠엔틴 타란티노, 미이케 다카시, 류승완…… 내게 영화라는 단어를 가장 흥미롭고 구체적인 장면들로 가르쳐준 이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에도 비디오 데크가 달린 TV와 가정용 게임기를 내 12살 생일 선물로 마련해주셨던 아버지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