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를 그린 이야기
어른이 된 지금도 세수할 때에 눈을 감으면 무서울 때가 있어요. 누군가 바로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럴 땐 빨리 눈을 뜨려고 후닥닥 물을 끼얹어요. 우습지요?
‘이 세상에 정말 귀신이 있을까? 귀신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오빠, 작은오빠, 할머니와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요. 엄마 아빠는 서울에서 일하느라 바빴어요.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할머니가 안 보였어요. 부엌에 가봤더니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가마솥에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밥에 뜸이 드는 동안 부엌 한 귀퉁이에 물을 한 사발 떠다 놓고 두 손을 모으고 “ 우리 식구 모두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주세요.” 하면서 기도했어요. 부엌에 사는 조왕님이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길 바라면서요.
나는 백석의 시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를 읽고 어린 나와 귀신들의 숨기 놀이라고 상상하며 그림책으로 그렸습니다. 나는 할머니 몰래 시렁에 걸린 메주에서 콩알을 떼어먹거나 차려놓은 밥상의 음식을 집어먹으며 장난을 칩니다. 그러면서도 귀신에게 혼날까 봐 눈치를 보며 집안 이곳저곳으로 피해봅니다. 하지만 집안 어느 곳에나 신들이 지키고 있어서 또 다른 장소로 달아납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마을 밖으로까지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정말 무서운 달걀귀신을 만나 마을을 향해 젖 먹던 힘을 다해 되돌아옵니다.
마을 밖에는 무서운 귀신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짝을 맺지 못하고 죽었다는 처녀귀신과 몽달귀신, 물에 빠져 죽은 뒤로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물속으로 잡아끈다는 물귀신, 돌처럼 발길에 차이다가 점점 커져서 앞서가다가 홱 뒤돌아보면 얼굴이 없다는 달걀귀신, 빗자루에 붙어있다는 도깨비, 무덤가에 나타나 머리 위로 휙휙 날아다니며 사람 혼을 빼놓는다는 구미호(꼬리가 아홉 개 달려있는 여우)까지 온통 무서운 귀신 세상이었지요. 하지만 이 그림책에 나오는 귀신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신들입니다. 달걀귀신 만 빼놓고요.
귀신을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한참 고민했어요. 그중에서도 디운구신 집터를 지켜주는 신이니까 집 전체를 떠받치는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집에 깔려 있는 느낌이 나서 디운구신이 불쌍해졌지요. 그래서 댓돌 옆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나쁜 귀신들을 물리쳐주는 모습으로 그려봤어요. 성주님은 집안의 할아버지처럼 인자할 것 같아 수염 나고 나이 지긋한 모습으로 그렸어요. 털능구신(철융귀신)은 뒤뜰의 장독과 우물을 지켜주니까 물을 다스리는 용의 모습으로 상상해보았답니다.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물속에 사는 용을 이무기라고 하지요? 집 앞에서는 수문장이 지켜주고 집 뒤쪽은 재주가 많은 용이 지켜준다면 정말 든든할 것 같아요. 제석신은 보통 세 명이나 열두 명이 함께 다닌다고 해요. 어린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잖아요? 한창 클 때니까요. 그래서 꿀이며 곶감이며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고방에는 열두 명의 어린이 제석님으로 그려보았습니다. 굴대장군이 화가 나면 연기와 티끌을 마구 뿜어 낼 거예요.
조왕님은 물에 빠진 적이 있어서 추위를 많이 탄대요. 그래서 부엌의 따뜻한 부뚜막에 머무르며 몸을 녹인다고 해요. 곡식을 빻는 연자방아에는 엄마가 자주 가니까 연자망귀신은 엄마처럼 그렸답니다.
고향이란, 집이란 언제나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겠지요. 또 든든한 마을신들이 지켜주기에 안심이 되는 곳입니다. 섬진강이 흐르는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가는 평안도의 산자락 속에서 자란 어린 백석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