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晏殊, 991∼1055)는 자(字)가 동숙(同叔)이고, 무주(撫州) 임천[臨川,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진셴현(進賢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떨치며 7세 때 이미 시문(詩文)에 능했다. 14세 때, 당시 강남안무(江南按撫)였던 장지백(張知白)이 그의 명성을 듣고 경덕(景德) 원년(1004)에 조정에 천거했으며, 이에 경덕 2년인 1005년에 사동진사(賜同進士 : 진사와 동급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를 통해 비서정자(?書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에 태자사인(太子舍人)·지제고(知制誥)·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역임했고, 세심하고 사려 깊은 성품으로 진종(眞宗)에게 무한한 신임을 얻었다. 인종(仁宗)이 즉위한 후, 유 태후(劉太后)에게 수렴청정을 건의하며 요직에 임명되었고, 인종에게 《역(易)》을 강의했다. 그 후에도 추밀부사(樞密副使)까지 승진 가도를 달리다가 유 태후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응천부(應天府)의 지부(知府)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이 친정(親政)을 한 후에는 다시 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아 관직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동평장사 겸 추밀사(同平章事兼樞密使)에까지 이르렀고, 무주 출신의 첫 번째 재상이 되었다. 범중엄(范仲淹, 989∼1052)·부필(富弼, 1004∼1083)·구양수(歐陽修, 1007∼1072)·왕안석(王安石, 1021∼1086) 등과 같은 북송 시기의 명사들이 한때 안수의 문하에서 대량으로 배출되었는데, 당시 그의 세력이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만년에는 진주(陳州)·허주(許州) 등지의 지주(知州)를 지냈다. 또한 임치공(臨淄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안수는 평생 비교적 순탄한 관로를 거치며 부귀한 생활을 누렸다. 지화(至和) 2년인 1055년에 향년 65세로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병사(病死)했다. 사공 겸 시중(司空兼侍中)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원헌(元獻)이다.
안수는 문학 창작에서 시(詩)·사(詞)·문(文) 등 다방면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동도사략(東都事略)》에 따르면 안수의 《문집(文集)》은 240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산일(散佚)되고 전하지 않는다. 그는 서법(書法)에도 능했는데, 특히 사작(詞作)에 출중해 ‘재상사인(宰相詞人)’이라고 일컫는다. 안수는 일생 만여 수의 사를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주옥사(珠玉詞)》 3권에 136수의 작품만이 전할 뿐이다. 이외에도 오늘날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유요(類要)》를 편찬했지만 대부분 전하지 않고, 그 잔본과 《안원헌유문(晏元獻遺文)》만이 전한다.
안수 사의 풍격은 만당(晩唐)과 오대(五代)의 완약(婉約) 풍격, 특히 남당(南唐)의 사풍(詞風)을 계승했다. 형식은 소령(小令)이 대부분이고 내용이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풍격이 특히 ‘함축완려(含蓄婉麗)’하다. 그의 사풍은 북송(北宋) 초기 사단(詞壇)에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안수는 강직한 성격을 소유했으나 이에 반해 그의 사어(詞語)는 대단히 유려하고 정연하다. 중국 문학사에서 당시의 구양수와 함께 ‘안(晏)·구(歐)’로 병칭하며 ‘북송 사인의 시조(北宋倚聲家初祖)’로 추앙되는데, 세간에서도 북송 시기 영사(令詞)의 대가로 불린다. 이외에도 북송 화간(花間)사풍의 종결자인 그의 일곱째 아들 안기도(晏幾道, 1038∼1110)와 ‘이안(二晏)’ 또는 각각 ‘대안(大晏)’과 ‘소안(小晏)’으로 불리며 북송 당시 소령의 유업을 전승한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