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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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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고양이>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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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의 되풀이: 결벽적으로 실패하기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그것은 한 사람을 신이 그에게 의도했던 대로, 즉 그의 부모가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그것은 한 사람을 그의 부모가 만들어 낸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이 식는다는 것―그것은 그 사람 대신에 테이블이, 의자가 보이는 것이다.* 비가 온 다음 날을 상상해 보라. 어제는 밤새도록 천둥번개가 쳤다.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반짝인다.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 가는 아이들, 우산이 없는 기쁨. 흙탕물이 넘치던 곳에는 차갑고 투명한 물이 흐르고 있다. 어제와 다른 물이지만 어제만큼 위협적인 물이다. 유보는 이 물살을 쓴다. 폭풍의 생존자로서 폭풍을 다시 산다. 온전히 돌이킬 수도 가뿐히 나아갈 수도 없는 잔해 속에서 그녀는 말 그대로 선택을 유보한다. 대신에 어제와 다른 어느 하루를 반복한다. 반복의 이유는 단 하나다. 낫지 않기 위해서. 낫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삶과 글쓰기 그리고 이 세계를 대하는 윤리다. 그녀는 쓴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프지 않고 싶지 않다”고. 시인은 언어를 한번 상실했다가 다시 한번 간절하게 되찾는 사람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언어가 우주를 분절한 결과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언어로 분절되기 이전의 우주를 향한다. 어떤 디딤대도 없는 무한의 흐름. 거기를 엿본다면 누구든지 말을 잃고 광기로 얼어붙을 것이다. 나는 내 친구 유보의 지독한 우울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시인은 실어와 광기의 찰나에 언어를 붙잡는다. 텅 빈 우주를 모험하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을 언어를. 나는 시인 유보의 글을 이렇게 읽는다. 유보가 빈집의 유령인 까닭은 언어로 분절되지 않는 저 아득한 우주로 여행을 떠났다가 귀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령은 죽음의 다음날에 기거한다. 이튿날. 죽음으로부터 한 발짝 걸어 나온 이 막연한 하루가 그녀를 쓰게 한다. 이 하루가 그녀를 낫게 한다. 유보는 결벽적으로 실패한다. 삶에, 사랑에, 글쓰기에. 나는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를 좀 찰싹 때리고 싶었다. 이렇게 지독하리만치 자신을 파고들어야 하냐고, 상처의 딱지를 떼어내야만 하냐고, 아직도 처음처럼 아프냐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었다. 이토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왜 작은 의심 하나에도 벌벌 떠냐고, 어떻게 이리도 여자일 수가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앞뒤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게는 어떤 ‘척’을 하지 않음으로써 지키고 있는 세상에 대한 예의가 있다”고 그녀가 썼듯, 이 책을 엮고 있는 투명한 힘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커다란 솔직함이다. 나는 유보라는 사람으로부터 솔직함이 커다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취약하여 언제든 훼손되거나 배신당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배웠다. 이것은 ‘언니’만이 알려줄 수 있는 삶의 비밀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삶의 마땅함으로부터 배신당한 어느 날에 이 책을 펼치면 좋겠다. 아무 페이지를 열어 거기에서 계속 얼굴을 씻고 있는 이의 몸짓을 느낀다면 좋겠다. 먼저 슬픈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책갈피 없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순차적으로 읽는 대신 문장들을 길어낸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앞도 뒤도 없이 헤엄치면 좋겠다. 그렇게 계속 책을 펼치다 보면 이 책이 꼭 당신 자신이 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올 텐데, 그때 비로소 당신은 다 울고 난 이의 깨끗한 얼굴로 깊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잠에는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다. *마리아 투마킨,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서제인 옮김, 을유문화사, 2023, 371쪽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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