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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연작소설. 이 소설은 다음 네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이순일이 차녀 한세진과 함께 철원군의 외조부의 묘를 없애는 이야기 <파묘>, 장녀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온 백화점 판매원 한영진의 이야기 <하고 싶은 말>, 어릴 적 '순자'라고 불리던 이순일의 피란과 고난, 친구 순자와 얽힌 옛 이야기 <무명>, 시나리오 작가인 한세진이 북페스티벌 참가를 위해 뉴욕을 방문하며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의 아들 노먼을 만나는 이야기 <다가오는 것들>. 이순일은 한영진의 가족과 함께 살며 그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한세진이 조금 겉돌긴 해도 가족은 대소사를 함께하며 자주 안부를 나눈다. 이순일의 옛 이름 '순자'만큼이나, 여타의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범상한 풍경.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 이 이야기들에 대해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라고 썼다.
이번엔 <무명> 속 용서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순일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106쪽, 142쪽) 피란을 거치며 이순일의 동생은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순일은 이 사건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리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말하지 않는 것을 안다. 장녀 한영진은 그 집의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취업을 했고, 이순일은 항상 새 밥과 새 국으로 귀가하는 한영진을 맞았다. 한영진은 "그 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과 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 (80쪽) 월급봉투를 내밀곤 했다. 이순일은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안다. 한영진이 말하지 않으면 이순일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142쪽) 있기에. 말하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들, 황정은의 문장은 수십 년의 이야기를 건너뛰며 그 사이의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삶은 이미 다가와 있다.
<다가오는 것들> 속, 다시 용서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한세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한세진의 여자친구 하미영은 안산에 생명안전공원을 만드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제작된 홍보 영상물 속 단어 '명품도시'를 보고 말한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어. 용서할 수가 없어." (174쪽)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은 미국인과 결혼해 '안나'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살았다. 동네의 한국인들은 '양갈보, 양색시'라고 '안나'를 불렀다. 윤부경의 아들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177쪽) 하고 한국어를 쓰지 않는다. 어떤 혐오는 '용서할 수가' 없고, 용서하지 않은 채로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디디의 우산>이 광장 이후의 우리에게 던지던 질문이 <연년세세>에서도 이어진다. 이순일이 겪은 폭력과 고난, 한영진과 한세진이 겪고 있는 피로와 몰이해. 우리의 삶은 연년세세 계속되고, 이 세계는 여전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들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