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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미니픽션' 열세 편을 만난다. 로렘 입숨(Lorem Ipsum)이라는 의미 덩어리로 묶인 이 소설집을 상상하면 양피지 열세 장을 묶은 기다란 띠의 모양새가 상상된다. '1500년대부터 인쇄와 조판 산업에서 레이아웃을 편집하는 데 쓰인 무작위 더미 텍스트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로렘 입숨'이라는 개념은 라틴어, '고통 그 자체dolorem ipsum'에서 이름을 빌렸다. 의미-고통 이 두 개념 사이를 횡단하는 말로 이루어진 소설들. 무의미하게 한글타자연습 게임에 입력하는 '별 헤는 밤'의 문장(이 시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처럼, 어떤 형식은 의미를 운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로렘 입숨' 덩어리로 만들어진 책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어 붙였을 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설을 오래도록 간절히 쓰고 싶었다'(75쪽)는 소설가의 바람은 <동사를 가질 권리>라는 소설에서 비로소 시도된다.
13곡으로 이루어진, 한 음악가의 정규 앨범을 듣는 것처럼 이 소설집을 읽었다. 200자 원고지 50매 내외라는 날렵한 형식의 소설에, 각 소설마다 작가가 붙인 코멘터리가 함께해 앨범 부클릿과 함께 소설을 감상하는 것 같다.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상아의 문으로>까지, 구병모는 의문을 제기하고, 당연함을 경계하며 작품 세계를 이어왔다. 왜 문장이 짧고 간결해야 하는지, 왜 의미 단위가 선명해야 하는지, 왜 소설이 잘 읽혀야 하는지 되묻는 지점에서 구병모의 세계가 시작한다. 죽은 자를 묻은 자리에서 그의 성품을 반영한 모양의 꽃이 피어나는 도시를 상상한 첫 작품 〈화장花粧의 도시〉의 화려함을 상상해본다. 모든 인간의 품성이 선할 리 없고, 모든 꽃이 아름다울리 없다. 화원과도 꽃동산과도 다른 탐미적인 세계와 그 세계의 이면을 상상하는 재미, 구병모의 팬이라면 이 세계의 꽃의 개성적인 빛깔에 매혹되고 말 것이다.